(세상 모든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
10여 년전 경기도 과천에 있는 경마장에 간 적이 있다. 경마장은 직접 가보지도 누구에게 들어보지도 못한 생소한 곳이어서 어떨것이라고 상상조차 잘 되지 않는 그런 곳이다. 다만 TV 드라마에서 보았는지 어디선가 들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모습이라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창구같은 곳을 향해 줄을 서서 표를 사고 있는 모습 정도라고 할까.
사실 경마장은 적은 돈으로 큰 돈을 버는 도박을 하기 위한 곳으로 그런 곳에 직접 가게 된 것도 놀라웠지만 거기서 내가 직접 본 모습은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함께 경마장에 도착한 나는 그의 안내대로 중앙계단을 타고 1층을 올라서니 내가 상상한 대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곳을 지나 1층 더 계단을 오르니 고급 레스토랑에 온 듯한 전경이 펼쳐졌다.
고급스러운 유리문에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를 하면서 안내를 하는 사람이 별도로 있는 그런 곳이었다. 안내하는 사람의 한 마디는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이곳은 양복이나 정장차림이 아니면 출입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물론 체육복에 운동화도 출입금지, 불가피하게 일행 중 한 명은 제지를 당했고 안내한 지인이 사정사정을 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무슨 도박장에 들어오는데 정장을 입어야 하는지 의아했다. 무슨 의식행사를 하는 곳도 아닌데 남자는 양복과 구두, 여자는 정장을 입지 않으면 출입이 안되는 곳이 있다니 신기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니 통유리로 되어 경마장이 훤히 보이는 곳에 고급스러운 쇼파들이 놓여있고 정장차림을 한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긴 뭐지라는 의문에 답을 하듯 서빙을 보는 여직원이 와서 차 주문을 받고 이용방법을 설명해주었다. 경기마다 어느 팀에 배팅을 할 것인지 결정이 되면 직원이 와서 주문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경험도 없고 배경지식도 없는 나는 소개한 사람의 의견대로 배팅을 했고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냥 보기에도 어느 회사의 높은 직급일 것 처럼 보이는 저 분은 어떤 사람일까? 저렇게 고상하게 앉아서 도박을 하다니. 일어나 경기장이 보이는 통유리쪽으로 가보았다.
아래로 경기를 준비중인 말과 마부가 보였고, 아래층에는 베팅을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고 큰 소리로 뭐라고 떠들어대는 사람, 삿대질을 하며 싸우는 사람, 몇일밤을 밖에서 새웠는지 모를 노숙자처럼 보이는 사람들,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찢어진 옷을 입은 여성까지 그야말로 온갖 모습의 사람이 모여있는 듯 했다.
방음벽인지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보이는 모습만으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경기가 시작되자 베팅한 종이를 움켜쥐고 각자 베팅한 말과 마부를 응원하는가 하더니 순식간에 종료된 경기의 결과에 따라 웃고 울고하는 사람들. 그런데 내가 있는 이곳 사람들은 큰 미동없이 다음 경기를 살펴보며 베팅을 한다. 우연히 함께 자리하게 된 사람, 자신을 대학교수라고 소개했다. 그 교수님은 처음왔다는 우리 일행에게 자신의 정보를 아무런 꺼리낌없이 알려주었다. 이 곳에는 개인 소유의 말이 있거나 일명 VIP만
올 수 있는 곳이고, 본인은 말이 한 마리 있다고. 여기 오는 사람들은 각자 말의 컨디션과 마부의 능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신뢰성 높은 베팅 정보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100%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각종 정보를 얼마나 반영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거기에 기존 승률에 대해 기록한 책자 등을 참고해 자신만의 베팅을 하는 것이다. 누구도 맹목적으로 따라하지 않는다. 책임은 오로지 나의 몫이니까. 그 교수님은 매월 한번 와이프에게 용돈을 받는 날 이곳에 온다고 했다. 그 용돈을 조금 늘려 한 달을 산다고. 큰 욕심은 절대 안부린다고.
적어도 내 눈에는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보였고 그마저도 잃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은 하라고 등떠밀어도 못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고상한 스카이라운지에서 차려입은 옷을 입고 앉아있어도 여기는 분명히 요행을 바라는 도박을 하는 곳인 것 같은데 적어도 이곳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고상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정도로 보였다. 나는 앞으로 살면서 두 번은 올일이 없는 곳으로 생각되었지만 내가 모르는 세상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