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한 기도 속에 나타난 작은 배려와 기적들
처음에는 검사를 하는데, 왜 입원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입원해 있으면 수시로 일어나는 ‘캔슬 자리’를 얻을 수 있고, 환자 스스로의 체력 소모도 줄어든다.
병원의 시스템을 하나씩 익히면서, 나는 비로소 내 권리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알게 되었다.
혈액내과 병동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통합병동에 머물렀고,
주치의를 직접 만나지 못한 채 마지막 퇴원 즈음에서야, 복도에서 스쳐 지나듯 목례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이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원무과 창구 앞에서 대기하던 중,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12년 전, 나는 혜화동 본원에서 수술을 받았지. 그 후로도 8년을 드나들었으니...
지금 여기에 내 자료는 없겠구나. 고작 폐 CT 뿐.'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구로 달려갔다. 사정을 설명하며 전원을 부탁드렸다.
직원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님, 지금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지금은 의료대란 상황이라 초진 환자도 거의 받지 못합니다.
본원에서는 더욱 쉽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옳았다. 당시 병원은 의료 파업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애써 웃으며 다시 말했다.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부탁드립니다. 혹시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꼭 검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대기석에 앉아 또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아들은 저쪽에, 딸은 바로 옆에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시간여를 그저 창구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눈에 분명히 보이는 게 있었다.
직원의 옆, 그 자리에 주님의 하얀 옷자락이...
'주님이 왜 저기 계시는 거지? 내 곁에 계시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서운한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잠시 후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창구 앞으로 다가갔다. 직원은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제가 모든 자료를 본원으로 보냈습니다.
본원과는 직통 라인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그쪽에서 가능하다고 판단하면 직접 전화가 갈 겁니다.
혹시 연락이 오지 않으면, 이 번호로 전화해 보세요.”하며 작은 메모장을 건네주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서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며,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돌아서면서 딸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몇 번이고 되뇌며 말했다.
“와, 언제부터 병원이 이렇게 친절해졌대?”
그날 저녁, 휴대폰에는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통화가 안 돼서 메시지 남깁니다. 원하시면 연락 주세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계속 기대 이상의 친절이 연이어 베풀어지고 있었다.
단숨에 전화를 걸었다.
필요한 서류, 영상, 그리고 앞으로의 절차까지 세세히 안내받았다.
마지막으로,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한 말이 흘러나왔다.
“주치의를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곧장 임 교수님의 이름을 꺼냈다.
사흘 전, 조카 민이의 생일날 사촌 올케언니와 나눈 대화 속에서 들었던 그 이름.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 교수님은 내년 여름까지 예약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원 생활에서 배운 지혜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취소가 생기면, 저를 넣어주세요. 매일 전화드리겠습니다. 꼭! 임 교수님 뵙고 싶어요.”
며칠 전 민이의 병실에서 열었던 생일 파티가 떠올랐다.
민이의 마지막 생일!
병원은 꽃 반입 금지중이어서, 통사정을 해 작은 꽃다발을 살짝 준비하며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민아, 네 삶은 너무나도 고귀하단다. 얼마나 힘들어. 이렇게 버텨줘서 고마워.'
민이가 우릴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유능하고 멋진 청년, 민이는 20년 세월을 투병을 해 왔다. 그 끝자락에 와 있는 것이다.
민이를 보며, 나는 오래전 세상을 떠난 오빠를 만났다. 이 아이는 오빠 판박이였다.
그리고 며칠 후, 기적처럼 나는 본원으로 전원 되었고, 마침내 임 교수님을 주치의로 만날 수 있었다.
돌아보면 모든 과정은 하나의 길로 이어져 있었다.
불가능하다는 설명, 끝없는 대기, 그리고 간절한 기도 속에 나타난 작은 배려와 기적들.
나는 그 속에서 분명히 느꼈다.
하얀 옷자락은 멀리 계셨던 것이 아니라, 늘 내 곁을 감싸고 계셨다는 것을.
나는 두 손을 모았다.
“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