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늘 예고 없이 불쑥 다가와 난타질을 해대고 있었다.
검사 결과지는 차갑게 말하고 있었다.
“좌측 견갑골, 임파선에 전이 그리고 좌측 유방에 new...”
그 순간, 세상이 멈춘 듯했다.
완치라는 말이 주었던 12년의 평온은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코발트 빛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청명한.
바람까지도 기분 좋게 살살 피부를 건드려주는, 이른바 걷기 좋은 날이었다.
날씨만큼 내 컨디션도 좋았던 그날.
24년 10월 1일
폐시티를 찍고 가뿐한 마음으로 결과를 확인하러 가고 있었다.
연례행사로, 12년 동안 해오고 있는 일이다.
유방암 수술을 할 때, 폐에도 무언가 의심스러운 녀석이 있다 해서...
그날은 주치의 선생님 사정으로 진료시간이 8시로 1시간 당겨져 있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야외주차장이 좋아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비록 아침은 걸렀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진료실을 향했다.
뺨에 닿아오는 피톤치드 뿜뿜 하는 신선한 아침공기를 맞으며
진료실 앞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빼곡히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 세상엔 아픈 사람도 많기도 하지.'
차례가 되어 의사 선생님 앞에 앉으니..
영상을 보여주시며 당신 뼈가 "흘러내리고 있어요... 블라블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말씀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한 참 후에야 나는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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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뼈가 흘러내린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영상을 다시 보여주시며 "이렇잖아요." 하신다.
까만 공간 속에 윗변이 넓고, 겉선이 길게 흘러내리는 사다리꼴 모양의 하얀 것이 보인다.
그게 뼈가 흘러내린 모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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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 한 달 전에도 또 몇 달 전에도 CT를 찍었었는데...
왜? 이제야 발견됐을까요?" 난 모기만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도 난 몇 달째 감기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선생님께선 2차 병원에서 보내온 기록지를 보여주시며 "여기 있잖아요."
거기엔 Cancer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박혀있었다.
'웅웅웅...'.
Cancer.
이걸 놓쳤다. 내 몸을 십수 년간 믿고 맡겼던 2차 병원의 의사 선생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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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흘러내린다."는 그 말 한마디의 무시무시함, 무거움에 짓눌려 다른 말들은 귓전으로 사라졌다.
의사 선생님은 마침표를 찍으시며, 빨리 혈액내과로 가라 신다.
12년 전 수술받았던 유방암이 전이된 거라며...
"여기 노교수님 계신데 왜요?...."라고 물으니
"노교수님 C 병원으로 옮기셨어요." 한다.
나는 천애고아가 되어 혈액내과로 내려갔다.
간호사의 "아침식사 하셨어요?"라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침 잘 됐다며 당장 입원해서 검사를 받으시라고 했다. 그 검사는 6시간 금식해야 한다며...
검사시간이 나온 걸 보니 오후 7시.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평소에 좋아하던 스카이워크로 향했다.
분당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
그곳 창가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그냥, 멍~때리고 있는데,
뺨 위로 물이 주르륵 흐른다. '응, 이건 뭐야? 혹시, 너 울고 있니?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었던 건가 보다.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분이 사탕을 건네시며 말을 걸어오셨다.
'이런 거 싫어서 스탠드 자리에 앉은 건데...'
금식 중이라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순간, 번뜩 정신이 돌아와, 잊고 싶었던 현실이 다시 눈앞으로 다가왔다.
일단, 아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미팅 중이었다.
먼 거리에 있었지만 시간은 충분했다.
입원 준비물을 알려주고, 간단히 상황 설명을 했다.
그냥 검사가 필요한 것일 뿐이라고...
난 그렇게 굳게 믿고 싶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잖아. 그 기분 나쁜 영상 말고는...'
시간은 마치 영화의 슬로 모션처럼 그런 속도로 흘렀다.
검사 시간이 다 되어서야 아들은 긴장으로 잔뜩 상기된 얼굴이 되어, 케리어를 끌고 내 앞에 섰다.
그때쯤 나는 거의 탈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가... 무슨 말이 더 필요했겠는가.
아들은 나를 부축해 CT실로 향했다.
이렇게 검사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삶은 늘 예고 없이 불쑥 다가와 난타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