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흔들려도, 사랑과 희망은 지지 않는다.
모처럼의 긴 황금연휴 덕분인지 젊은이들은 환호를 하며, 모두들 해외로, 들로, 산으로,
각자의 쉼을 찾아 떠나는 모양새다.
도시가 텅 빈 느낌이다.
친구들의 카톡이 계속 올라온다 "까똑. 까똑, 까까똑"
아들 딸들이 모두 떠난 집에 남은 건 고요한 집과 노인 둘... 그리고 오래된 기억뿐이다.
친구들의 이야기는 대동소이했다.
"우리는 지금 영월에 내려와 있어 단종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아들 딸들은 다 해외로 나갔고...",
"우리도 이번엔 큰댁으로 안 가고 우리끼리 조촐하게 지내려 해." 등등.
이제까지 힘들지만 이어 오던 차례를,
올해는 단출하게 모시기로 했다던지, 아니면 그냥 패스하기로 했다는 내용들이었다.
너무 힘들어 이날을 꿈꿔왔지만,
이렇게 길들여진 우리는, 막상 면전에 서고 보니 죄책감 내지는 숙제 안 한 아이들이 되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좌불안석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이를 지키던 마지막 세 대가 될지도 모른다.
길 위의 차들은 줄었고, 제사상은 단출해졌다.
이렇게 희미하게 "명절"의 색깔은 빛을 바래가고 있었다.
이러다가... 툭 가슴이 내려앉는다.
예전엔 없는 가운데서도 냄비 뚜껑이 달그락거리고, 전 붙이는 냄새와 웃음소리, 잔소리가 뒤섞여
복닥복닥 집안 전체가, 마을 전체가 소란스러웠었다.
오히려 없는 집일수록 종가로 몰려와 제수 장만도 거들며, 온 가족이 며칠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나는 명절 당일이 되면,
마당의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끼니마다 쉴 새 없이 나오는 설거지를 해야 했다.
설거지는 보통, 세광주리쯤으로 정리를 끝내고 나면, 수북이 쌓인 광주리들을 보며 아픈 허리를 펴곤 했다.
무언가 해낸 장한 얼굴을 하고.
더운물도, 바람막이도 없는 휑한 마당 수돗가에서, 찬바람이 빰을 할퀴는 속에 눈물 훔쳐가며 설거지했던 서울내기 새댁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오죽했으면 며느리들의 한 서린 애환가가 시중에 회자되기도 했으랴~.
지금 돌이켜보니 힘은 들었지만 그 마저도 웃음거리로 마음속에 따뜻하게 전해져 온다.
'편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고속도로 위에 이어지는 꽉 막힌 13시간의 기다림 행렬 속에서도, 우리들은 “민족 대이동”이라며
웃기도 했고, 자긍심도 가졌다.
그 속에서 우린 한 민족이란 끈끈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각자의 차 안의 내용도 거의 비슷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부모님 면을 세워드리기 위해 무리해서 바리바리 실은 선물들,
돌아오는 귀경길에도 마찬가지.
차의 뒤 트렁크엔 갓 수확한 농산물이 바리바리 실려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삼삼오오 모여, 무슨 무용담이나 되는 양, 질세라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집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딸은 서아의 입시가 잘 해결이 되어,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작정으로 신나게 긴 여행길을 떠났다.
2년 반을 혼신을 다해 준비했던 입시 스트레스를 날리겠다는데야...
박수로 환호해 주며, 전도양양해진 서아의 앞날을 위해 손을 모아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래도 아들이 곁에 있어 주어 든든한 모양새를 갖췄다.
그러면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음식도 사람들의 마음도 지지고 볶았던 명절이었지만,
어머니가 차리던 차례상보다 더 귀했던 것은, 그 곁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온기였다는 걸.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명절을 무너뜨린 걸까, 아니면 시대가 바꾼 걸까.'
어쩌면 둘 다일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믿는다.
사람이 모이고 웃을 이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함께 밥을 먹고, 마음을 주고받는 순간이 곧 우리의 의식이고 기도다.
꼭 집이 아니면 어떠랴~.
예전처럼 시끌벅적하진 않아도 그 안에는 여전히 "우리"가 있다.
문득 어머니의 손길이 떠오른다.
조용히 나물을 무치는 그 손길 속엔 아무 말 없이 이어지는 사랑이 있었다.
그 일을 내가 이어왔고 이젠 물려주어야 할 차례다.
명절은 형식이 아니라, 서로를 기억하는 마음의 의식이다.
세상은 변해도, 사랑의 온도는 변하지 않는다.
명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습만 달리해 우리 안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지켜가야 할, 가장 오래된 예절인 것이다.
바람에 흔들려도, 사랑과 희망은 지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