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이제는 함께 가는 여정

첫눈은 두려움으로 시작했지만 감사로 녹아내렸다

by 산수골지윤핼미

사상 유례없이 내린 물먹은 첫눈



첫눈은 유난히 무겁게 내렸다. 나라 전체가 눈사태 소식으로 술렁였고, 산수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30여 시간의 정전으로 어둠이 내려앉은 산수골은, 바람조차 소리를 죽이고,


숨죽인 숲처럼 고요했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뜨거운 물 한 모금도 데우지 못하고, 통신은 끊겨 서로를 부르지도 못하던 그 밤.

전기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속수무책.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전사태 이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예전에 사용했던 브루스타를 다시 구입하는 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살아간다는 건 결국, 서로의 연결이라는 것.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고립은 눈보라보다 더 차가운 두려움이었다.


감기란 녀석의 방문과 선물


그 사이 감기 증상이 밀려왔다. 항암 중인 나에게 열은 가장 민감한 신호다.

체온계의 숫자가 오르내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36.7… 37.5… 37.9… 그리고 마침내 38.2.
숫자는 마치 눈처럼 차곡차곡 쌓이며 공포를 키웠다.


황급히, 남편과 함께 혜화동 응급실로 향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여기서는 해줄 수 없다.”

"열이 38도 넘으면 꼭 이곳으로 오라는 교육상담실의 설명이 있었는데요..."


차가운 벽 앞에서 막막한 무력감에 빠졌다. 시간은 많이 지체되어, 우린 빨리 차선책을 세워야 했다.


그 상황에서도 신뢰가 무너진 2차 병원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우리는 동네의 작은 종합병원으로 달렸다. 그곳은 호흡기내과도 없었다.


작은 종합병원 이비인후과에서 만난 젊은 의사 선생님은 혈액 검사 후 내 상태를 꼼꼼히 살펴보고

키스칼리의 부작용 같다며 약을 처방해 주셨다.


“내일 주치의께 이 약을 보여드리고 확인받으세요.” 짧은 말속엔 자신감과 진심이 담겨 있었다.


놀라우리 만큼 편안히 잠을 자고 일어났고, 임교수님 역시 그 처방을 높이 평가하셨다.

'이제 집 가까운 곳에 내 몸을 맡길 선생님이 계신다.' 마음이 따뜻해지며 든든함이 저 깊은 속에서 올라왔다.


큰 선물을 받아 안고 기쁨감사드렸다.




힘듦 속에 또 하나의 큰 난제를 해결해 주셨다.
주님! 감사합니다.



본스캔과 CT 검사를 위해 다리에 맞아야 하는 조영제 주사


며칠 뒤, 3개월마다 있는 본스캔과 CT 검사를 위해, 다리에 맞아야 하는 조영제 주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툰 손길은 지옥 같은 통증을 남겼고, 이 노릇을 어떻게 평생 견뎌나가나? 하는 막막 감에,


'치료를 중단해야 할까?'라는 절망감까지 몰려왔었다.


하지만 곧 숙련된 간호사의 손길이 이어졌다. “날이 차가우면 발을 따뜻하게 하세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세심한 배려는 나를 눈물짓게 했다.


그 순간, 나는 간호사의 손끝에서 천사의 손길을 느꼈다.


검사 결과도 좋았다. 끊어졌던 견갑골의 뼈가 실낱같지만 이어진 것이 보였다.

불과 6개월 남짓 동안의 결과에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임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초기인데 이렇게 듣지 않으면 어떻게요."

한참을 되새겨야만 했다. '점점 내성이 생길 거라는 말씀이구나.'


그러나 백혈구 수치는 432.

건강한 이들의 수치가 6,000에서 10,000이라 했으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결국 약을 줄이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제야 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일상생활의 범위는, 나와 한참 다르다는 것을.

나는 스스로 자가격리를 하며 매일 그놈의 수치와 싸워야 했다.


약을 먹고, 격리하며,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하는 장기 전이라는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 싸움은 매일의 수치와 씨름하며,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었다

싸움은 병과의 전쟁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인 것이다.



그 와중에도 삶은 이어졌다. 전시는 무사히 마쳤고, 작은 성취가 꿀처럼 달았다.

친구의 전화, 갤러리의 미소, 가족의 손길...


그것들은 마치 혹독한 겨울 속에서도 피어나는 작은 봄꽃 같았다.



아버지의 기일, 나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아빠,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임교수님께 치료받고 있어요.

새로운 약들이 제게 시간을 주고,

그 시간 속에서 저는 삶을 다시 쓰고 있어요."


첫눈처럼 무겁게 쏟아지는 고통 속에서도, 햇살 같은 감사가 내 마음을 덥혔다.

첫눈은 두려움으로 시작했지만, 감사로 녹아내렸다.


나는 안다. 이 길은 끝이 아니라,

여전히 내가, 살아내야 할 여정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이 길은 끝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내야 할 여정의 한가운데라는 것을.
나는 비로소 안다.







"옥류동 계곡의 눈" watercolor on paper mixed media116.8*91.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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