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77)

제377편 : 김기택 시인의 '사무원'

@. 오늘은 김기택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사무원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 종일 손익관리대장경(損益管理臺帳經)과 자금수지심경(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 간의 장좌불립(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사무원](1999년)

#. 김기택 시인(1957년생) : 경기도 안양 출신으로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으며, 동시를 쓰며 동화를 번역하는 일도 함. 평소 “시는 어렵지 않아야 공감을 얻는다”란 말을 하고 다닐 정도로 읽으면 쉽고도 생각하게 하는 시를 많이 씀







<함께 나누기>


오늘 시는 무척 길지만 시인 소개에서 밝혔다시피 읽으면 그냥 머릿속에 쏙쏙 담기게끔 표현했기에 쉽게 느껴질 겁니다. 특히 한 번이라도 직장인으로 살아본 적 있다면 마치 나의 얘기를 풀어놓는 듯 공감도 갈 터.
시 전체를 아우르는 비틀기(풍자)에 따른 비유와 묘사를 이해한다면 이 시가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묘파한 시임을 알게 될 겁니다. 사실 이 시를 해설함은 군더더기일 뿐이라 그냥 시 한 번 더 읽는 게 낫습니다만 시간 여유 있는 분들을 위해 덧붙입니다.

먼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의자에 앉아 일하는 사무원의 일상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으로 그려냄에 주목해 봅니다.

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일하는 행위를 ‘고행’으로,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을 ‘공양’으로, 몸과 다리가 언제나 의자에 붙어 다니는 모습이 마치 불상처럼 보였을까요, 그런 식의 표현이 계속 이어집니다.
사무원이 뒤적이는 서류의 숫자는 ‘손익관리 대장경’과 ‘자금수지 심경’으로, 전화벨은 ‘종소리’ ‘북소리’ ‘목탁 소리’로 들려오고, 윗사람에게 올리는 보고서는 ‘(공)염불’로, 아부성이 깃든 인사는 ‘108배’로, 다달이 받는 급료는 ‘시주’에 비유돼 있습니다.

이렇게 사무원이 30년 간 묵묵히 의자에 앉아 근무함을 ‘장좌불립(長座不立 :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선 채로만 수행)’이라 했습니다. 원래 불교에선 장좌불와(~臥 : 결코 눕지 아니하고 꼿꼿이 앉은 채로 수행)만 있는데 시인은 이를 슬쩍 ‘와’ 대신 ‘립’으로 바꾸었습니다.

다음 주목할 부분은 14개 이르는 문장이 모두 ‘~다고 한다’ 형태로 끝맺는다는 점입니다. 보통 시에서 이러한 반복은 운율을 실감나게 조성하고 시어의 의미를 강조할 때 주로 씁니다.
헌데 오늘 시에서는 이러한 일반적 의미 말고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고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진술로 보입니다. 즉 이러한 표현은 ‘내가 한 주관적인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내가 끌어왔을(인용했을) 뿐이므로 객관성 있는 말이라고.

오늘 시에서 특히 비틀기(풍자)가 도드라진 부분을 찾아봅니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오늘도 삶의 현장인 일터로 나가는 직장인 여러분, 특히 의자에 앉아 일하시는 분, 점심 시간 즈음 이 시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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