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산골일기(214)

제214편 : 요즘 가장 사랑하는 밭작물은?

* 요즘 가장 사랑하는 밭작물은? *



여름철이면 시골 밥상이 아주 풍족해진다. 물론 가을엔 곡식이나 과일을 많이 거둬들여 풍성하긴 마찬가지지만 당장 필요한 부식은 여름이 최고다. 아침마다 식탁에 오르는 샐러드에 꼭 필요한 토마토가 한창 나올 때고, 오이냉국 가지냉국을 좋아하다 보니 오이 가지가 쑥쑥 머리를 내민다.
연한 호박 잎사귀를 살짝 데쳐 멸치젓국에 쌈 싸 먹는 맛 역시 비할 데가 없고, 거기에 깻잎 상추가 부지런히 제 몫을 한다. 허나 역시 최고는 된장에 풋고추 찍어 먹기. 실하게 잘 자란 고추를 따와 그냥 소매로 쓱쓱 문지른 뒤 된장 바르고 입에 넣기만 하면 끝.

오이냉국이나 가지냉국, 호박쌈처럼 조리의 과정 필요하거나 데칠 필요가 일절 없다. 고추, 된장, 입이 삼위일체 이루면 될 뿐. 끼니마다 부부 한 사람당 대충 세 개씩 먹으니 여섯 개, 하루에 열여덟 개가 필요하나 그 정도는 날마다 나온다.




나는 시쳇말로 하면 ‘맵찔이’다. 매운 걸 잘 못 먹는다가 아니라 아예 못 먹는다. 예전 매운 고추 먹고 장탈이 나 응급실에 실려 간 이후 절교했다. 그러니 요즘 먹는 고추는 다 소위 ‘아삭이고추(달리 오이고추)’다. 아삭이는 약치지 않아도 치명적인 탄저병에 걸리지 않고 끝까지 잘 버틴다.
허니 가지가 마를 때까지 먹을 수 있다는 말이다. 헌데 이 녀석들이 요즘 배신을 때리고 있다. 갑자기 매워진 것이다. 순간 ‘아차!’ 했다. 원래 아삭이랑 매운 김장용 고추 심을 땐 거리를 둬 심어야 했는데 올봄에 바쁜 일이 밀려 거기 신경 쓰느라 모르고 바로 곁에 심었으니.

시골 사는 이는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고추는 매운 것과 안 매운 것을 멀찍이 띄워 심어야 한다. 그러잖으면 둘의 품성을 반반씩 닮아가기에. 고추는 소위 ‘자기 꽃가루받이’ 작물이다. 이 말은 한 꽃의 수술에서 나온 꽃가루가 같은 꽃의 암술머리에 옮겨져 수정되는 식물이란 뜻이다.




문제는 '자기 꽃가루받이'가 대체로 70% 정도이고 나머지 30%는 '다른 꽃가루받이'를 통해 열매가 맺힌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스스로 수정하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다른 품종과 섞여 수정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 말대로 ‘매운 고추’와 ‘안매운 고추’를 가까운 곳에 심으면 30%는 꽃가루가 서로 섞여 매운고추는 덜 맵게, 안매운 고추는 더 맵게 변한다. 그러니까 아삭이고추 옆에 매운 김장용 고추를 심었으니 맵게 변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게 매운지 안 매운지를 먹어보지 않고선 전혀 구별할 수 없다.

요즘 이 30%를 실감한다. 세 개 먹으면 한 개는 매우니까. 적당히 매운 녀석과 아주 매운 녀석이 반반 섞였다. 다만 내가 워낙 맵찔이라 둘 다 못 먹으니... 그래서 고추밭을 볼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처음 심을 때 둘을 떼놓지 못함을. 이제사 둘 사이에 벽을 칠 수도 없고.




이즈음에서 고추란 말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단 세 가지 설이 있다.

① 한자 ‘고초(苦草, 苦椒)’ 설 : 매울 ‘苦’와 풀 ‘草(혹은 매운 풀 椒)’이 합쳐져 ‘매운 풀’이란 뜻의 한자에서 왔다는 이론이다.
② ‘순수 우리말’ 설 :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일본을 거쳐 들어왔다는 설에 반대하는 이론으로, 오래전부터 고추는 우리나라에 자생했고 고추란 우리말도 쓰였는데 한자어 고초(苦草, 苦椒)에 밀렸다는 이론.
③ 남성 생식기인 ‘고추’에서 유래설 : 이 이론은 고추의 모양이 남성의 성기와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된 것인데 아무래도 좀 어설프다.




아삭이와 김장용 고추를 곁에 심은 잘못도 잘못이지만 그 사이 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완전 무농약 고추 재배다. 허나 이게 얼마나 허구인지 고추 농사지어 본 사람은 알리라. 고추만큼 약 많이 쳐야 할 작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덜 치면 바로 병이 든다. 가장 악질 탄저병은 답이 없다. 이놈이 달라붙으면 끝이다. 사람의 병에 비유하면 에이즈보다 더하다. 살아날 수 없으니까. 열심히 친다고 하여 안심 놓지도 못한다. 언제 놈이 달라붙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있다. 고추 농사는 탄저병과의 전쟁이라고.




만약 탄저병이 없다면 고추 심는 사람은 다 부자가 되리라. 밑거름만 보태주면 달리고 또 달리니까. 전문가는 한 그루에 마른 고추 한 근(600g)은 나온다 한다. (한 유튜브에서 한 그루에 3kg 수확이라는 영상이 올라왔던 적도 있어 다섯 근도 수확할 수 있다는 말인데 사실인지 조심스럽다. 아니면 건조 안 된 고추인지...)
우리야 거기까진 바라지 않으나 그저 김장용 고추엔 탄저병이 빨리 오지 않고 아삭이에게도 병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벌써 약을 안 친다는 소문이 노린재 마을에 퍼졌는지 노린재가 마구마구 달라붙는다. 노린재 떼 내 죽여야 하는 일거리가 새로 생겼다.

제발 8월 넘어 9월까지 아삭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장용 고추야 안 되면 사 먹으면 되지만 아삭이는 우리 밭에 심은 게 아니면 좀 찝찝하다. 요즘 고민한다. 아삭이의 대빵에게 아침마다 기도해야 하나 하고. 제발 9월 중순까진 버텨 달라고. 고 기똥찬 맛 잃지 않게 해 달라고




<뱀의 발(蛇足)>

대화 중에 속담 섞어 하는 분들 보면 괜히 유식해 보입디다. 고추 관련 속담 몇 개 실으니 널리 활용하시길.

① 된장에 풋고추 박히듯 : 어떤 곳에 가 꼭 틀어박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
② 고추 줄기에 그네를 뛰고 잣 껍질로 배를 만들어 타겠다 : 불가능한 잔꾀를 부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③ 눈 어둡다 하더니 다홍 고추만 잘 딴다 : 눈이 어두워 잘 못 본다고 하면서도 붉게 잘 익은 고추만 골라 가며 잘도 딴다는 뜻으로, 마음이 음흉하고 잇속에 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④ 고추보다 후추가 더 맵다 : 뛰어난 사람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있음을 비유적으로 이르거나, 몸집이 작은 사람이 큰 사람보다 재주가 뛰어나고 야무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⑤ 고추밭을 매도 참이 있다 : 고추밭 매기처럼 힘이 덜 드는 일을 하더라도 참을 준다는 뜻으로, 작은 일이라도 사람을 부리면 보수를 주어야 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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