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편 : 박소란 시인의 '노래는 아무것도'
@. 오늘은 박소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노래는 아무것도
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키타 한 채 실려간다
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 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 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 [심장에 가까운 말] (2015년)
#. 박소란 시인(1981년생) : 서울 출신이나 삶의 대부분을 마산에서 보냈으며,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등단. 현재 프리랜스 에디터(한 군데 소속돼 있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기자)로 활동 중이며, [세계일보]에 ‘박소란의 시 읽는 마음’을 연재하고 있음.
<함께 나누기>
글 쓰는 이가 ‘자신의 일에 가장 환멸 느꼈을 때’란 설문조사에서 몇몇 글쟁이들의 답글을 읽은 적 있는데, 이런 내용 하나가 떠오릅니다. 자기가 펴낸 책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에서 처리하려 그런 일 도맡아 하는 장사치를 불렀는데, 고물상에 kg당 100원에 파는 걸 알았을 때.
어디 작가뿐이겠습니까. 흘러간 노래를 CD로 낸 가수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자기 CD가 오디오에 올려져 있는 대신 벽에 인테리어처럼 걸려 있을 때랑, 하도 조르기에 아는 이에게 그림을 준 화가가 이발소에 갔다가 자기 그림이 걸렸는데 그 그림 군데군데 파리똥이 붙었을 때도 마찬가지겠죠.
시로 들어갑니다.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키타 한 채 실려간다 // 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 /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한 시절 누군가의 젊음을 대신하며 그의 심장 가장 가까운 데서 사랑을 속삭이며 울렸을 통기타, 이제 고물상으로 갑니다. 가본들 전혀 돈 되지 않고 불태워질 뿐. 그러고 보니 하모니카, 색소폰, 드럼 같은 악기 가운데서 기타가 가장 심장 가까이에 자리하는군요. 이렇게 위치 면에서 심장 가까이 있다는 식의 해설 말고, 내 심장을 가장 울렸던 노래란 뜻도 담았습니다.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김광석 등 이름난 기타리스트의 기타는 그 자체가 상품이 되지만, 무명 음악가의 기타는 낡은 고물상행 트럭에 실려 덜컹거리며 비명을 질러댑니다. 마치 곧 화염 속에 사라질 자신의 처지를 예감하는 양.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 영원이 아니어라 /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그 옛날 통기타 연주로 불렀던 노래는 가진 것 하나 없는 젊음을 구원해 줬던 탈출구였건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영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불렀던 사랑의 노래, 그리움의 노래가 그 사람 없는 지금은 노래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다만 흉터였으니 /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지워지지 않는 흉터,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상처. 그 상처를 찌르는 칼은 결코 날카로워선 안 됩니다. 슬픈 사람에겐 예리한 칼 대신 무딘 칼이 필요할 뿐. 왜냐면 날카로운 칼처럼 흉터를 찌르지 않고 슬며시 후벼대야 그것이 어설프게라도 슬픔을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 때문에.
“칼이 실려 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고물상행 리어카에 실린 건 모두 버려질 존재입니다. 칼(‘통기타’를 비유)도 마찬가집니다. 상처 입은 사랑도 마찬가집니다. 버려져 잊혀질 존재입니다. 한 시절 화자가 부르던 노래, 심장 가까운 곳을 맴돌며 사랑의 진실이라 믿었던 노래는 상처의 아픔만 더할 뿐 상처를 온전히 도려내지는 못합니다.
“나를 실어 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에서 화자를 보기 역겨워 버리고 떠나는 임을 향해 가시는 길에 진달래꽃 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허나 이 시에서 화자는 버림받은 내가 아픈 만큼 당신도 오래도록 아팠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저주의 말이기보다는 주문(呪文)으로 보고 싶습니다. 당신도 나를 기억하며 아파해 달라는.
혹 이사를 하거나 집 정리할 때 첫사랑과의 추억이 깃든 물품을 아내(또는 남편) 몰래 간직하고 있다가 들켜 버려야만 했던 기억이 있는 분들. 이 시를 읽으며 그 추억의 물품이 가는 끝이 어디라는 걸 생각하면서 눈물 한 방울쯤은 흘릴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