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89)

제389편 : 정진규 시인의 '서서 자는 말'

@. 오늘은 정진규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서서 자는 말
정진규

내 아들은 유도를 배우고 있다.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했다.
낙법만 배웠다고 했다.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이태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잠들어도 눕지 못했다.
나는 서서 자는 말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구나.
흐르는 물은
벼랑에서도 뛰어내린다.
밤마다 꿈을 꾸지만
애비는 서서 자는 말.
-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년)

#. 정진규 시인(1939 ~ 2017) : 경기도 안성 출신으로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현대시학] 주간을 맡았고, ‘몸시’ 같은 산문시의 영역을 개척하는 등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다가 별세.



<함께 나누기>

아프리카 정글에서 (얼룩) 말은 잠을 잘 때 서서 잡니다. 사자 같은 맹수가 공격해 올 때 빨리 발견하여 빨리 달아나기 위해서랍니다. 일본 여행 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인은 국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마십니다.
그 풍습이 만들어진 이유로 예전 사무라이 시절에 언제라도 적이 칼 들고 공격해 올 때를 대비해 재빨리 반응하기 위해서랍니다. (다른 이유도 있음) 숟가락으로 국 떠먹으려 고개 숙이다가 상대를 놓치면 공격을 받으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오늘 시는 비교적 쉽게 읽힐 겁니다. 읽다 보면 ‘한 집안 가장의 고독과 비애’를 노래함을 알게 되고.
가장은 편한 자세로 눈 한 번 붙이지 못하고, 컴컴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잠자다 새벽을 서서 맞이합니다. 시인에게 아버지란, 즉 가장이란 ‘서서 자는 말(馬)’입니다. 편하게 자려면 누워서 자야 하건만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은 잘 때도 바로 누워선 안 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내 아들은 유도를 배우고 있다. /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 배웠다고 했다”

아들은 유도를 배우려 도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거기 다닌다면 ‘업어치기, 빗당겨치기, 배대뒤치기, 어깨로메치기, 밭다리후리기, 안다리후리기’ 등 공격기술부터 배우는 줄 알았는데... 웬걸 이년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합니다. 즉 낙법만 배웠다고 하니 화자가 깜짝 놀랄 수밖에요.

“낙법만 배웠다고 했다. / 넘어지는 것을 배우다니!”

아들이 유도도장에 다니며 배운 건 공격이 아니고 수비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넘어지는 방법만을 배우다니! 도무지 이해 안 됩니다. 세상에 살려면 공격적이어야 합니다. 수비로는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게 내가 여태 깨달은 삶의 지식입니다.

“네가 넘어지는 것을 / 배우는 이태 동안 /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 기를 쓰고 살았다”

아들이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동안 화자인 아비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왜냐면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사는 터전은 ... 정말 그렇습니다. 넘어지면 누가 도와 일으켜 주려는 사람보다 밟으려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해서 나는 잠들어도 눕지 못했고, 서서 자는 말(馬)이 되어야 했습니다.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구나. / 흐르는 물은 / 벼랑에서도 뛰어내린다.”

갑자기 아들에게 부끄러워집니다. 아들이 넘어지면 일어나는 걸 배우는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고 남을 넘어뜨리는 일만 배웠으니까요. 물은 깎아지른 절벽에서도 뛰어내립니다. 즉 떨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떨어지는 걸 두려워합니다.

넘어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은 결코 일어설 수 없습니다. 한 번도 넘어져 본 적 없는 사람은 넘어져 있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짐이 실패한 삶이 아니라 넘어지고도 일어서지 않음이 실패한 삶이라는 걸 깨달아야 했건만.
유도에서 넘어지는 법, 즉 낙법을 먼저 배우는 까닭은 일어서기 위해선 잘 넘어져야 함을 가르쳐주기 위함일 겁니다. 넘어질 수밖에 없는데 억지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다 보면 다신 일어나지 못할 중상을 입게 됩니다.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 오늘부터 넘어져도 쉬 일어날 수 있도록 ‘삶의 낙법’을 배워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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