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편 : 안현미 시인의 '갱년기'
@. 오늘은 안현미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 [깊은 일](2020년)
#. 안현미(1972년생) : 강원도 태백 출신으로 2001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현재 남산예술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삶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 많음
<함께 나누기>
오래전 버스를 탔더니 앞줄에 또래로 보이는 두 아주머니가 나누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하도 크게 말하기에. 한 명이 털어놓기를 ‘요즘 밥맛이 없다’, ‘괜히 우울하다’, ‘사는 재미가 없다’, ‘아들놈도 서방놈도 다 싫다’, ‘하늘과 땅이 확 뒤집혔으면 좋겠다’
그러자 다른 분이 받아서, “아이구 마 니한테도 갱선생이 찾아왔나 보다.” 하기에 처음엔 갱선생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갱년기란 뜻임을 알았지만.
오늘 시는 국숫집에서 국수 먹으며 갱년기에 얽힌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심정을 담았습니다.
“호르몬이 울고 /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 호르몬이 미워하고 /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살아가면서 사랑하고 그리워하다가 상처받아 울고, 그러다 몹시 미워하는 일 모두가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임을 압니다. 헌데 이 깨달음을 왜 하필 국숫집에 와서야 얻었을까요? 아무래도 긴 국수 가락과 연관이 있는 듯. 모든 인연이 국수 가락처럼 끊어질 듯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듯이.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지는 인연의 정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 죽고 싶다고 말하는 / 나는 누구인가?”
어릴 때 울엄마도 저나 동생이 애먹이거나, 아버지랑 싸우고 나면 이 두 마디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아이고 마, 이 집구석 탕탕 뽀사삐고 말끼다.’ ‘내가 죽어삐야 이 꼬라지 안 봐도 될 낀데.’ 그러다 세월이 흘러 쉰에 이르자 갑자기 그 말이 쑥 들어갔습니다. 그럼 그 시절이 갱년기였나?
“국수 가락처럼 긴 / 사생과 결단의 끝”
화자는 금방 손 놓을 것 같건만 여지껏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그것도 호르몬 탓인가. 실은 우리네 삶 자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죽으려 해도 쉽게 죽을 수도 없는 게 삶이기에.
“당신, /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부부란 참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모여 어울리려고 살아가는 존재라 합니다. 맞지 않지만 억지로 맞춰가야 하고. 우스개로 한 부부가 하도 힘들어서 죽기로 작정하고 약을 사 와선 먹기 직전에 서로 먼저 먹어라고 권하다 싸움이 나서 없었던 일이 되었답니다.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지금은 그렇지 않아도) 원래 국숫집은 밥 한 끼 사 먹을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이 찾는 곳이라 허름하게 살아가는 군상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사랑이니 미움이니 하는 얘긴 사치입니다. 오직 한 끼 때울 식사만 주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찾는 곳입니다.
화자는 거기서 자신이 앓고 있는 갱년기가 얼마나 사치인가를 깨닫습니다. 그곳에선 감정이 사라진 치열함만 존재하니까요.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찾아 모인 사람들이 함께 들이키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갱년기로 아직 아파하시는 분들에게 새벽시장에 나가 국밥 한 그릇 드셔보라고 권합니다. 그 치열한 삶 속에서 반드시 얻는 무엇이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