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편 : 전윤호 시인의 '수몰 지구'
@. 오늘은 전윤호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수몰 지구
전윤호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烏石)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 [늦은 인사](2013년)
#. 전윤호 시인(1964년생) :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1990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우리나라 시인 축구단 ‘글발’ 초창기 멤버이며, 모 회사 영업사원으로, 또 출판사 운영하다 현재 전업시인으로 오직 시 쓰기에만 열중함.
<함께 나누기>
처음 「수몰 지구(水沒地區)」란 제목을 대했을 때, 이 시는 '삶의 터전을 잃고 고향에서 쫓겨난 실향민의 애환을 적은 내용'이거나, 아니면 '환경 파괴를 다룬 좀 무거운 시'일 거라 여겼습니다. 헌데 아니었습니다. 고향을 잃은 슬픔이 아니라 사랑을 잃은 슬픔, 즉 ‘사랑의 수몰’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댐ㆍ수몰ㆍ태풍ㆍ수차ㆍ수문’ 이런 시어를 사랑과 연결시켜 풀어나간 시인의 능력이 돋보여 이 시를 붙잡았습니다.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 서둘러 댐을 쌓았다”
화자는 그대에게 자꾸만 이끌리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포기할 순 없고, 그대로 둘 수도 없어 댐을 만들어 계속해서 흘러오는 사랑의 감정 흐름을 막으려고.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 피해 주기 싫었다”
툭하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그대 향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혹 그로 하여 그대에게 피해주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대 향한 배려의 몸짓이다만, 허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깨닫기엔 시간이 그리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막힌 난 수몰 지구다 /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더 이상 사랑의 물길이 흘러들지 않으리라 여겼건만 점점 불어나 이미 제어할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나는 수몰지구나 마찬가집니다.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감정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고 수몰돼 버리니까요.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오석(烏石)은 단지 빛깔이 검은 돌이 아니라 다른 돌보다 단단하고 무겁습니다. 뜬 사랑보다 가라앉은 사랑을 택하려 오석이 되고자 합니다. 그 까닭은 나를 댐 속에 가두고 그냥 오석처럼 저수지 맨 밑바닥에 쑥 가라앉아 그대 생각에 잠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 수문을 연다”
허나 사랑의 물길을 막는다고 막을 수 있던가요. 때로는 예고 없이 몰아치는 태풍처럼 소나기처럼 한순간 마음을 확 뒤집어놓습니다. 그러니 결국은 수문을 열 수밖에요. 국경도 민족도 초월하는 무지막지한 사랑의 홍수 앞에 화자는 무릎을 꿇습니다. 아니 이는 항복이라 할 수 없겠지요.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 나는 충전된다”
잠시 막혀 있던, 사그라들었던 사랑의 에너지가 수문을 연 덕에 수차(水車)가 돌고, 거기서 얻은 에너지로 방전된 화자가 충전됩니다. 그리하여 새로 충전을 통해 얻게 된 진실 하나가 있습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실은 사랑이란 이름의 집착이었음을.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 꽃 피는 너의 마당이 / 잠기지 않기를”
흘러넘친 물 때문에 그대 사랑의 꽃밭이 다시 수몰될까 봐 무척이나 조심조심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 사랑의 공식에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집착뿐인 허울의 사랑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려 합니다. 그래야만 힘들게 충전시킨 보람이 있을 테니까요.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또 전화질이야!’ 하는 말을 그대에게 들을까 봐 들었던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숨을 참습니다. 때를 놓친 사랑은 홍수이자 재난일 뿐임을 깨달으면서.
이 시에서 물의 양면성이 잘 드러납니다. 수차를 돌게 만들어 화자를 충전시키는 에너지로서의 긍정성과, 댐을 넘치게 할 정도로 흘러내리는 물은 꽃 피는 그대 마당을 잠기게 하고 홍수가 되는 부정성도 지니는.
오늘 시는 과도한 집착으로 사랑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겁니다. 나로 인하여 그대 다치지 않기를, 나로 인하여 그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선돼야 참사랑이라 하겠지요.
*. 두 번째 사진은 그리스 한 지역이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가 최근 극심한 가뭄으로 45년만에 드러난 예전의 모습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