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96)

제396편 : 하재일 시인의 '불량 과일'

@. 오늘은 하재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불량 과일
하재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여름내 열매는 방 하나씩 들이고 산다

고백할까, 망설이며, 설익어간다

풀밭에 떨어져 쉽게 뒹구는 것들 때문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인 줄 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이렇게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게 된 것일까

익기 전에 떨어져 멍이 든 불량한 과일들,
대체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은, 또 뭐람!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 [동네 한 바퀴](2016년)

#. 하재일 시인(1961년생) : 충남 보령 출신으로 1984년 [불교사상] 주최 '만해불교문학상’ 수상을 통해 등단. 경기도에서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다 퇴직했는데,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살면서 시를 쓴다고 함.




<함께 나누기>

요즘 우리 텃밭에는 대추가 잘 익어가고 있습니다. 옮겨 심은 지 5년 동안 열릴 동 말 동 하더니 드디어 올해 왕창 열렸습니다. 지난주에 잘 익은 듯한 빨간 게 보여 먹었습니다. 참 달콤했습니다. 헌데 아내가 먹으러 한 입 베어 물더니 툇! 툇! 하곤 내뱉았습니다.
“아이구 마, 벌레 다 먹었잖아.” 그 말에 한 입 베어 속을 살피니 벌건 부분이 보였습니다만 벌레라곤 생각 못했습니다. 허나 진짜 벌레였습니다. 올해는 약 치지 않았더니 침범했는 듯. 그래도 정말 달콤했는데, 모른 체하고 더 먹으려 했으나...

오늘 시는 꽃이 진 자리에 들어선 열매에 벌레가 먹고, 그러면서도 맛난 과일로 익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몸속 깊이 / 여름내 열매는 방 하나씩 들이고 산다”

이제부터 ‘사랑하겠다’ 하고 선언한 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랑은 시나브로(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찾아와 둥지를 틉니다. 마치 꽃이 지고 난 그 자리에 열매가 몰래 들어앉듯이.

“고백할까, 망설이며, 설익어간다”

어느 순간 마음에 드는 이성이 나타납니다. 고백과 망설임의 첫사랑 짝사랑 풋사랑의 시기를 거쳐 ‘한 생애가 온통 철없는 사랑’으로 발전해 갑니다. 사랑에 눈이 멉니다. 오직 그만 눈에 들어오고, 그의 목소리만 들려옵니다. 장미도 그보다 예쁘지 않고, 꾀꼬리 소리도 그의 목소리보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내 안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와 / 이렇게 신맛도 나고 단맛도 나게 된 것일까”

헌데 드라마처럼 꼭 사랑에는 방해꾼이 나타납니다. 사람일 수도, 운명일 수도, 얕은 자기 마음일 수도 있는 그 방해꾼은 한 마리의 벌레로 내 안에 들어앉습니다. 벌레 먹은 과일이 그냥 매끈한 과일보다 더 맛있듯이 기복 없는 사랑보다 상처와 곪을 안은 사랑이 훨씬 더 아름다운 것임을 그때는 잘 모르지요.

“익기 전에 떨어져 멍이 든 불량한 과일들, / 대체 감추어 둔 쓸쓸한 상처 한 줌은, 또 뭐람!”

가끔씩 익기 전에 떨어져 멍든 불량과일처럼 사랑도 결실을 맺지 못하고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 쓸쓸한 상처 한 줌, 아니 어떤 땐 한 보따리가 찾아오기도 하겠지요. 허나 사랑이 그리 속절없이 끝나던가요?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 / 누가 그래, 누가 그래, 속절없이 끝난다고?”

오히려 상처를 겪은 사랑이 더 영원하다고 ‘내 몸에 든 까만 눈썹의 애벌레 한 마리’가 독백하듯 말합니다. ‘상처 입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라는 등식이 여기에도 적용되나 봅니다.

이 시에 나온 사랑을 저는 해설의 편의상 이성 간 사랑으로 봤습니다만 꼭 그렇게 한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시를 읽으며 내 속에 들어온 그 첫 목소리를 음미해 보시기를.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