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 아홉 가지 끈
시골살이를 하면 끈이 필요합니다. 고춧대에 고추모종 고정시킬 때부터 토마토, 가지, 오이를 버팀목에 붙들어 맬 때도 끈이 필요합니다. 뿐이랴, 볏단 묶어 늘어놓을 때도, 빨래 널려 빨랫줄 달 때도, 마늘 묶어 말릴 때도, 별꽃이랑 풍선덩굴이 지붕 위로 오르게 할 때도, 그늘막을 칠 때도 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생활에 직접 필요한 진짜 끈 말고 어쩌면 이런 끈보다 더 챙겨 갖고 살아가야 할 끈이 있습니다. 그 끈의 수는 사람마다 다를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에겐 한두 가지만, 어떤 사람에겐 열 가지도 부족할 것입니다.
여러 끈 가운데 아홉 가지 끈을 추려 제가 살아가는 에너지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아래 아홉 가지는 제 삶의 끈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 물론 글벗 님들의 끈은 따로 있을 겁니다. 굳이 '끈' 아니라도 되겠지요. 흔들리는 나를 붙들어 맬 수 있다면 그 이름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1. 질끈 :
사람은 꿈을 먹고사는 동물이라 나이와 관계없이 그 나름의 꿈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대부분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그에 따른 노력은 등한히 하는 편입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꿈만 세우고선 행동은 옮기지 않을 적이 많은데 그럴 때 머리에 띠를 '질끈' 동여매고 책상에 앉는데서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은 시작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르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다 내다버리고 다시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려 합니다.
2. 불끈 :
살아가다 보면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이 있고, 그와는 달리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하지 않고 넘길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불의를 보았을 때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정의로운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정의를 행하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
그러나 불의와 불합리를 보았을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나서야 합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나 대신해주기만을 기다리면 영원히 기다림으로 끝날뿐이니까요. 내가 먼저 앞장설 마음을 가질 때 '불끈'이 앞에 섭니다.
3. 화끈 :
일할 때는 일하더라도 놀 때는 '화끈'하게 놀아야 한다는 말은 무엇을 하든 열정적으로 해야 함을 뜻합니다. 즉 뜨뜻미지근한 자세를 버리라는 말이겠지요.
이 '화끈'은 일과 노는 데에만 쓰일까요? 아니 오히려 베푸는 일에 더 자주 사용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줄 땐 화끈하게 도와줘야 한다.'처럼 이왕 베풀 때는 '화끈'하게 내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4. 너끈 :
무슨 일을 하든 모자람이 없이 넉넉할 때 '너끈'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어느 경지가 되어야 '너끈'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 개인차가 있어 객관적이진 않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보아 이 정도면 너끈하겠다 할 정도가 되어야 하겠지요.
뜻을 세우고, 계획성 있게 노력하면 절로 실력은 쌓이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쌓은 '너끈'은 자신감을 갖게 하고, 이 자신감은 교만이 아니라 노력으로 이룬 참 실력이기에 발전을 위한 알짜배기 밑거름이 됩니다.
5. 매끈 :
아무리 작은 공예품이더라도 장인은 흠결 없이 완벽한 작품을 '매끈'히 만들어냅니다. 또 비록 비싼 옷은 아니지만 깨끗이 빨아 풀 먹여 다린 '매끈'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참 환하고 깨끗합니다. 외모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깔끔히 씻고 빗질로 머리칼을 다듬어놓으면 본바탕보다 훨씬 말쑥하고 훤칠해 보입니다. 글을 써놓고 퇴고 과정을 잘 마무리하면 그 글이 돋보입니다.
이 네 가지 경우 모두에 통하는 말이 ‘매끈’입니다.
6. 끈끈 :
냄비는 쉬 뜨거워지지만 식기도 빨리 합니다. 헌데 뚝배기는 그와 다릅니다. 데울 때도 시간이 걸리지만 오래도록 식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렬히 사랑을 하더라도 삼 년을 채 넘기지 못한다는 보도를 접한 적 있습니다. 그럼 금혼식까지 넘겼으면서도 서로를 아껴주며 사는 노부부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바로 '끈끈'한 정의 힘이 아닐까요?. 이 '끈끈'함은 부부 사이는 물론 친구, 그리고 뜻을 함께 하는 동지 사이에도 통하겠지요.
7. 힘끈 :
힘끈은 '힘껏'의 경기도와 함경도 사투리입니다. '힘끈 당기다', '힘끈 뛰다', '힘끈 노력하다' 등에 쓰이면서 우리에게 힘을 주는 단어입니다. 힘껏보다 힘끈으로 쓰면 끈끈함의 의미도 얻게 되어 좀체 무너지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갖게 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의 안이 위기였다가 이젠 나라 밖이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숨쉴 틈을 주지 않지만 이럴수록 힘끈 노력해야 하겠지요.
8. 새끈 :
‘새끈’은 ‘세련되고 끝내준다’ 또는 ‘섹시하고 끝내준다’는 의미로 새로 만들어진 말인데, 주로 사람의 외모나 분위기가 매우 멋지거나 매력적일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특히 여자보다 남성에게 근육질 몸매나 강인한 정신적 매력을 느낄 때 ‘새끈하다’고 표현합니다.
날이 갈수록 남성이 여성화하는 경향이 짙어갑니다. 남자다운 강인한 매력이 부족할 이 시기에 새끈한 매력을 지닌 사내다운 사내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9. 욱끈 :
살아감에 '욱끈(건강)'보다 소중한 게 있을까요? 나이 들어도 건강한 사람이 있는 반면 젊어도 허약한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전자도 후자도 아닙니다만) 이는 짬짬이 시간을 내 '욱끈'을 챙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에서 온다고 봅니다.
한번 잃은 '욱끈'은 되찾을 수 없거나 회복하려도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결국 평소에 절제 있는 생활과 운동을 하여야 한다는 가르침을 얻습니다.
이상 이 아홉 가지 끈을 모두 함께 '노끈'으로 꽁꽁 묶어 간직하고 살면 좋을 텐데, 부족함 많은 인간인지라 매번 글만 그럴듯하게 쓸 뿐입니다.
*. 마지막 아홉 번째 '욱끈'은 사전에 없는 말이나, 한겨레신문(2008년 12월 3일)에 실린 백기완 님의 회고록 [길을 찾아서]에서, ‘건강’을 가리키는 그분의 고향(황해도) 말이라 했습니다. 이런 좋은 토박이말은 살려 써야 한다고 여겨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