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97)

@. 오늘은 하종오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비밀번호
하종오

사무실 문을 열기 위해 개폐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부터
너는 비밀번호로 출근이 확인된다
업무일지를 간직한 책상 서랍도
서류를 저장한 컴퓨터도
남자나 여자로 알지 못하고
너를 비밀번호로만 허용한다
너의 얼굴은 외면되고
너의 가슴은 망각된다
밥과 찬을 차려주는 구내식당도
대소변을 받아주는 화장실도
주인이나 손님으로 모시지 않고
너를 비밀번호로 접수한다
너의 구강은 무시되고
너의 비뇨기는 무력해진다
서성거리는 무수한 비밀번호들 사이에서
너는 비밀번호로 서성거리고
속삭이는 무수한 비밀번호들 사이에서
너는 비밀번호로 속삭이고
이익을 계산하는 무수한 비밀번호들 사이에서
너는 비밀번호로 네 이익을 계산한다
너는 네 자신을 늘 잊어도
상사에게 비밀번호로 호출되고
부하 직원에게 비밀번호로 호칭되지만
상사를 비밀번호로 호칭하고
부하 직원을 비밀번호로 호출하여
너는 네 자신을 잘 지킨다
길거리에서 잎을 돋아낸 버즘나무들을 세지 않고
그 그늘을 지나가는 소비자들을 세면서
사람들을 마음이나 영혼으로 만나지 않는 게 너는 편하다
사무실 문을 닫고 개폐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부터
너는 비밀번호로 퇴근이 확인되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기 위해 개폐기에
다른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순간부터
너는 다른 비밀번호로 귀가가 확인된다
너도 처도 자식도 서로 비밀번호를 확인한 뒤
비로소 안심하고 같이 숙면에 든다
- [지옥처럼 낯선](2006년)

#. 하종오 시인(1954년생) :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7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초기엔 서정시를 쓰다 2004년부터 이주노동자 문제를 화두로 삼고 이를 표현하는 시를 많이 쓰며, 현재 강화군 시골에 살며 시를 씀.




<함께 나누기>

이 시를 읽어가다 보면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칠 겁니다. ‘맞아, 우린 이제 비밀번호의 노예지.’ 하며 말입니다. 그래서 시행 하나하나에 해설 다는 대신 제 경험을 담은 생활글(수필)을 덧붙입니다.

- 아 비밀번호!!! -

오래전 모임에 갔다가 집에 와 문을 열려고 했을 때 갑자기 현관문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열쇠로 여닫던 잠금장치가 디지털 도어록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됐기에 기억나지 않았던 것.
허나 걱정하지 않았다. 하도 잘 잊어버리기에 휴대폰 노트에 저장해 두었으니. 헌데 아뿔싸, 모임 식당에 휴대폰 놔두고 왔는지 호주머니에 없었다. 당황했다. 휴대폰이 없으니 집에 들어갈 수 없고 아내에게 비밀번호 물어볼 수도 없다.
전화기 빌리려 아래 가음댁 할머니집에 갔더니 마침 할머니도 보이지 않고, 하필 동네 사람들이 그날따라 어찌나 보이지 않는지... 한참을 기다려서야 이장님 차가 내려오기에 휴대폰을 빌려 간신히 아내에게 연락해 들어갈 수 있었다.

헌데 그날의 불운은 끝나지 않을 모양인지 모임에서 회비가 밀렸다는 얘기를 들었던지라 총무에게 인터넷 뱅킹으로 돈 보내려 열었는데 이번엔 거기 비번이 생각나지 않았다. 한 번 어긋나니 뒤죽박죽이 돼 결국 그날 부치지 못하고 다음 날 직접 그 식당에 가 전화기를 찾고서야 겨우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찾아온 휴대폰 속에 저장해 놓은 비밀번호가 얼마나 많은지 한 번 훑어보았다. 거래하는 모든 은행계좌 비번과 카드 비번. ‘다음, 네이버, 구글’ 같은 포털사이트. ‘SRT, KTX, 대한항공, 아시아나,’ 같은 기차나 항공편.
‘옥션, 11번가, 쿠팡’ 같은 쇼핑업체. ‘~~시청, ~~교육청, ~~문화원’ 등의 공공단체 홈페이지. 기타 무료 사진 사이트의 비밀번호 등.

이런 곳에 비번 잊어버리면 출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곳을 뒤지면 나의 흔적이 거기 남게 된다. 그동안 해당기관에 들어가기 위한 편리함 때문에 비밀번호를 이용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를 읽으며 문득 내가 바로 비밀번호의 노예가 아닌가 하는.
솔직히 몇 년 전까지는 비밀번호를 따로 외울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모두 같은 번호나 기호로 했기 때문에. 헌데 그러면 나중에 해킹의 위험이 있고, 또 주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기에 이리저리 바꾸다 보니 어느 곳에 어떤 비번이 쓰였는지 기억 못한다.

그걸 (휴대폰) 노트에 저장해 놓았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고 안 가져오면 모든 행위가 중단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 누구는 인쇄하여 책꽂이 한쪽에 끼워두거나,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다는데 그게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비밀번호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달리 나를 대신한 비밀번호가 지금 세상에 돌아다니며 나 대신 그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 또 내 모든 행위가 그대로 까발려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다음 시행이 무섭다.

“서성거리는 무수한 비밀번호들 사이에서 / 너는 비밀번호로 서성거리고 / 속삭이는 무수한 비밀번호들 사이에서 / 너는 비밀번호로 속삭이고 / 이익을 계산하는 무수한 비밀번호들 사이에서 / 너는 비밀번호로 네 이익을 계산한다”

*. 혹 아래 시행에 대하여 궁금해하시는 분이 계실까 봐 대충 떠오른 제 생각을 붙입니다.

“대소변을 받아주는 화장실도 / 주인이나 손님으로 모시지 않고 / 너를 비밀번호로 접수한다”

들를 때마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화장실은 아마 없겠지요. 만약 기획실의 김대리가, 총무부의 미스 리가 오늘 몇 번이나 화장실 들락날락했는지 누가 안다면... 대신 병원에 가 건강검진할 때 대ㆍ 소변 검사하려 분비물을 통에 담아 내놓으면 거기에 바코드를 찍습니다. 바코드가 그 개인 하나하나의 번호를 할당받으니까 비밀번호나 다름없다는 뜻으로 쓴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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