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01)

제401편 : 강윤후 시인의 '한밭, 그 너른 들에서'

@. 오늘은 강윤후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한밭, 그 너른 들에서
강윤후

나를 표시하는 몇 개의 숫자들과 더불어 산다
간혹 집 전화번호나 통장 비밀번호 같은 것을 잊고서
청어 대가리처럼 어리둥절해한다

먼 도시의 지인들 사이에 떠도는
나에 대한 소문들을 듣기도 한다
소문에서 나는 무엇에 대단히 화가 나 있거나
누구를 아주 미워한다 행복한 가장이 되어
세월을 잊고 세상일마저 모른 채 지낸다고도 한다
소문만으로도 내 근황이 충분하므로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본다

아무 징조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그러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문득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이 너른 들판 어디쯤에선가 나도
그렇게 시동이 꺼질 것이다
갑작스레 멎을 것이다
- [현대문학](2003년 7월호)

#. 강윤후 시인(1962년생, 본명 강헌국) : 서울 출신으로 1991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등단 후 30년 동안 단 한 권의 시집 [다시 쓸쓸한 날에]만 펴냈으며, 현재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동료 교사의 자제 결혼식에 갔다가 열 살가량 어린 후배랑 뷔페에 함께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이런저런 얘기가 오고 갔지요. 제가 들은 얘기를 후배에게 확인하려 물었습니다.
“김 선생 명퇴했다던데 요즘 뭘 하고 지내?” 하는 말에, “아이구 선배님, 미치겠어요. 아직 멀쩡히 잘 다니고 있는데...” 하며 꺼내놓은 얘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명퇴한 게 아니라 어느 날 먼저 퇴직한 동료랑 술 한잔하면서 자기도 내년에 명퇴해야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냥 술김에 한 말일뿐인데 그게 그만 이상하게 번져 정말 명퇴한 걸로 소문났답니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 소식 이렇게 듣는 경우가 종종입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나를 표시하는 몇 개의 숫자들과 더불어 산다”

은행 같은 곳에 가면 번호표 줍니다. 그러면 창구 행원이 그의 이름 부르는 대신 ‘123번 손님!’ 하고 부릅니다. 나의 이름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습니다. 마치 교도소에 들어가면 이름 대신 수인번호로 불리듯이.
하기야 나의 이름은 몰라도 살지만 현관 키 번호 모르면 집에 들어갈 수 없고, 통장 비번 모르면 생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숫자만 남았습니다.

“청어대가리처럼 어리둥절해한다”

해석이 좀 애매합니다만 제 맘대로 풀어봅니다. 청어는 환경 변화에 극도로 민감하여 물 밖으로 나오면 곧바로 죽습니다. 숫자를 잊어버리면 현대인은 청어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니까 그 모습을 비유한 게 아닌가 합니다.

“먼 도시의 지인들 사이에 떠도는 / 나에 대한 소문들을 듣기도 한다”

얼마 전 아내랑 예전에 알던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그에 대한 어떤 소식도 못 들었다는 말을 하다가 ‘혹시 그 사람 하늘로 간 게 아니야?’ 했던 적 있습니다. 어쩌면 어디선가 제가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거나, 혹 로또 1등 당첨돼 서울 대치동 소재 5층 학원 건물 샀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지도...

“소문만으로도 내 근황이 충분하므로 /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본다”

나이 들수록 삶은 진부해지고 사소한 일만 생깁니다. 열정도 꿈도 사라진 그 자리에 별 볼 일 없는 일상의 관심이 대신하고. 그러니 먼 데서 들려오는 말도 안 되는 자신에 대한 풍문을 들어도 내겐 ‘피식!’ 헛웃음거리일 뿐 마음에 어떤 파장도 일지 않습니다. 한 귀로 흘리며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후비듯 일없이 달력이나 넘겨볼 수밖에요. 언뜻 보면 삶을 초탈한 것 같지만 실은 씁쓸한...

“아무 징조도 없이 계절이 바뀌고 그러다 / 어느 날 아침 출근하려는데 문득 / 자동차의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나이 들면 정기 건강검진할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하더군요. 이번엔 무슨 병이 찾아왔을까, 올해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까 하며. 누가 말했지요. 일흔 넘으니까 나이 먹는 숫자보다 알약 먹는 개수가 더 늘어난다고. 정말 그랬습니다. 시동이 걸리지 않을 때가 왔습니다.

“이 너른 들판 어디쯤에선가 나도 / 그렇게 시동이 꺼질 것이다 / 갑작스레 멎을 것이다”

마지막 이 시행에서 갑자기 ‘울컥!’ 하는 뭔가가 치밀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하다니! 참 먹먹합니다. 잘 달리는 차가 어느 날 시동 꺼지듯 나의 심장에도 시동이 꺼지겠지요. 정비소로 달려가본들 “차라리 새 차 사는 게 나을 겁니다”란 소리만 들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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