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22)

제422회 : 고운기 시인의 '좋겠다'

@. 오늘은 고운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좋겠다

고운기


저물 무렵

먼 도시의 번호판을 단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빠져나간다


가는 동안 밤을 맞더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버스에 탄 사람 몇이 먼 도시의 눈빛처럼 보이는데


손님 드문 텅 빈 버스처럼 흐린 눈빛이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집에는 옛날의 숟가락이 소담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구름의 이동속도](2012년)


#. 고운기 시인(1961년생) : 전남 보성 출신으로 1983년 대학 재학 중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삼국유사] 연구에 관한 한 자타가 공인하는 석학이며, 현재 한양대 문화콘텐츠 학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오늘 시를 읽으면 장면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그려질 겁니다. 어둑어둑한 밤길을 가는 시외버스가 찾아가는 궤적을 따라. 그리고 시 제목 '좋겠다' 앞에 붙일 수 있는 구절은? 하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두 말 없이 '(집으로 가는 길이면) 좋겠다'로 하고 싶습니다.


신인 '줄리아 로버츠'를 톱스타로 만든 [귀여운 여인]에서 리차드 기어가 묵는 140평 되는 베벌리 윌셔 호텔 룸이 하룻밤에 4000달러(대략 600만원)나 된답니다. 거기서 하룻밤 자봤으면 하는 꿈은 간직합니다만 며칠이라면 몰라도 내 집보다는 편하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현재 거처하는 집이 내겐 최고의 둥지니까요.


시로 들어갑니다.


"저물 무렵 / 먼 도시의 번호판을 단 시외버스 / 터미널에서 빠져나간다"


터미널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는 곳입니다. 또한 떠나고 돌아오는 일도 동시에 진행됩니다. 오래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던 이가 본향의 그곳 사람을 만나 추억을 확인하려 되돌아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는 동안 밤을 맞더라도 /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가는 길의 종착지가 집이라면 캄캄 밤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을 편히 쉴 수 있는 곳이라면 밤인들 비가 온들 눈이 내린들 어떻습니까. 어둠이 길을 막아 발 내디디기 힘들어도 관계없습니다. 거긴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고향 그 말엔 포근함이 담겼으니까요.


"버스에 탄 사람 몇이 먼 도시의 눈빛처럼 보이는데"


'먼 도시의 눈빛'은 고단하고 지쳐서 감정이 메말랐거나, 혹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찌들러 생기 없고 무감각해 보임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이렇게 지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손님 드문 텅 빈 버스처럼 흐린 눈빛이라도 /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비록 모진 세파에 찌들려 생기 잃은 흐린 눈빛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면, 더욱 고향 가는 길이라면 참 좋겠습니다. 고향은 성공한 이들만 당당하게 찾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지쳐서 힘들어서 아파서 몸 눕힐 공간 찾는 이에게 정말 꼭 가야 할 곳이니까요.


"집에는 옛날의 숟가락이 소담하게 /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음만으로도 평온하고 따듯하게 아침을 맞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집에는 숟가락들이, 숟가락의 주인공들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소담하게 놓인 숟가락은 쉽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응원이 됩니다. 이내 집을 다시 떠나야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집과 숟가락의 끄는 힘이 만유인력처럼 늘 나를 끌어당기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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