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8편 : 이인원 시인의 '분홍 입술의 시간'
@. 오늘은 이인원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분홍 입술의 시간
이인원
방금
발등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그때
셔터에 잡히지 않았다면
까맣게 지워졌을 장면들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다
누가 가슴에 삽을 댄 것일까
깜짝 놀라 깨어난 분홍 입술의 시간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
내가 죽고
네가 산다면
그래도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푸르렀던 젊은 날 개장해 보자
녹슨 애증의 시절 이장해 보자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
자꾸 달싹거리는 날에는
- [그래도 분홍색으로 질문했다](2020년)
#. 이인원 시인(1952년생) : 경북 점촌 출신으로 1992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마흔에 등단한 게 아쉬운지 좋은 시 많이 쓰고 있으며, 참 이름만으로 오해할까 봐 '여성 시인'임을 미리 밝힙니다.
<함께 나누기>
사진 한 장이 오래된 기억을 촉발할 때가 종종입니다. 제가 아주 아끼는 사진이 사라졌습니다. 제 잘못으로. 7년 전 장가계 여행 중에 999개 계단으로 이루어진 ‘하늘계단’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이 계단은 높이 150m에 경사도 20~45°에 매우 가팔랐는데, 이 계단 걸어 올라간 사람이 꽤 될 겁니다만 저는 그날 기록을 세웠습니다. 2018년 5월 7일 장가계 하늘계단을 최초로 오른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불행히도 이 사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고작 7년밖에 안 됐습니다만 그걸 볼 때마다 "야 굉장한 일을 해냈구나!" 하는 뿌듯함이 따랐는데... 다른 사람 뒤를 따라갔다면 기억에 남지 않겠습니다만 그날은 제가 가장 먼저 앞장서 올랐으니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 사진은 몇 년간 제게 용기를 줬는데 휴대폰에 들어있다 컴퓨터로 옮겼건만, 작년 내장하드가 손상되는 바람에 날려버렸고. 밴드와 카톡으로 보냈건만 밴드는 한때 정리하는 바람에 다 지웠고, 카톡 통해 받은 걸 저장하신 분이 계신다면 몰라도 지금은... ㅠㅠ
오늘 시는 책갈피에 끼워두었던 사진을 화자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당시의 사람과 장소로 연결됩니다. 이 시에선 ‘순장’ ‘매장’ '발굴' ‘도굴’ 같은 고고학 관련 용어가 나옵니다. 사랑했으나 잊으려 했던 그와 관련된 추억을 이런 용어로 정리했으니.
“방금 / 발등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 책갈피 속에 영영 잠들었을 이 한 컷 / 그때 / 셔터에 잡히지 않았다면 / 까맣게 지워졌을 장면들”
책갈피를 뒤적이다 사진 한 장이 뚝 떨어집니다. 이젠 기억에 가물가물한 그와 관련된 사진 한 장이. 그와 놀러 갔던 그 장소에서 찰칵할 때 셔터에 찍힌 장면은 그 사진 아니었더라면 영영 잊고 지냈을지도 모르는데.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 /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 //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다”
순장은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이 사망했을 때, 그에 예속된 사람과 소유물을 함께 묻던 잔혹한 장례 풍습입니다. 그러니 ‘기억 속에 순장된 얼굴’은 땅속 깊이 묻혀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으니 그대로 뒀다면 완전히 잊혔다는 뜻입니다.
‘눈꺼풀 아래 매장된 만남과 이별’은 기억 속에 깊이 묻혀있는, 잊히지 않는 과거의 추억을 뜻하는데 누군가 들추면(도굴하면) 그게 드러날 수 있는 여지를 남깁니다. 이런 기억이 ‘발굴이 되기도 도굴이 되기도’ 했습니다. 발굴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드러냄을 뜻한다면 도굴은 제삼자로부터 사실이 드러남을 뜻합니다.
“벼락같은 한 장면과 다 늙어 죽어 다시 만난다면”
불교의 윤회설에 따르면 네가 죽고 내가 살거나, 내가 죽고 네가 살거나 우린 결국 언젠가 만나게 됩니다. 둘이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때 다시 만나게 되면 나는 너에게 어떤 말을, 너는 나에게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용서를 비는 말, 아니면 원망의 말?
“그래도 /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그를 잊고 조용히 살던 내 가슴에 사진 한 장이 던진 파문. 갑자기 마음속 깊이 잠자던 추억이 분홍 물결이 되어 일렁입니다. 푸르렀던 날, 이미 녹이 슬었으나 입술 끝에 그의 이름이 달싹거립니다. 그의 얼굴이 손에 잡히듯 만져집니다. 그때 나는 분홍색으로 질문합니다. 원망도 아쉬움도 또 다른 말을 다 버리고 오직 사랑의 감정 담은 말로.
“도톰한 분홍 입술의 시간 / 자꾸 달싹거리는 날에는”
화자의 도톰한 분홍 입술에 머물며 토하는 말은 오직 한 사람 그대를 향해 달싹입니다. 거기엔 생명의 활기가 느껴집니다. 분홍색이 주는 시각적인 효과와 열정과 관능의 이미지가 환기되면서 잔잔했던 시상에 갑자기 큰 파문이 일어나고.
*. 첫째는 2018년 제가 올랐던 999 하늘계단인데 제 사진은 없어 다른 이의 사진으로 대체하며, 둘째는 1960년대 미스코리아에 출전한 한 아가씨인데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줍니다.
둘 다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