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29)

제429편 :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 - 부빈다는 것'

@. 오늘은 김신용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도장골 시편 -부빈다는 것
김신용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운 비 *듣는 소리를 낸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안개와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화음(和音),
강아지가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무게가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표면장력,
나뭇잎에 물방울이 맺힐 때마다,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는
안개,
그 안개의 입자(粒子)들

부빈다는 것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나무의 그늘이 나무에게 등 기대지 않듯이

그 그늘이 그림자들을 쉬게 하듯이
- [부빈다는 것](2009년)

*. 듣는 : ‘듣다(聞)’가 아닌 ‘떨어지다(落)’

#. 김신용 시인(1945년생) : 부산 출신인데 초등학교가 최종학력으로 전문적인 창작 교육을 받지 못함. 14세 때부터 떠돌이 생활, 지게꾼 등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다 '88년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펴내 등단.
이 시인에 대한 평론가의 말입니다.
“김신용의 시는 동시대의 노동시들 중 가장 뛰어난 완성도를 성취한 예로 봐도 된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오늘 시는 그의 시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구요.




<함께 나누기>

‘부비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비비다’의 사투리로 나오는데 어느 지역인지 밝히지 않고 비비다의 잘못 표기로만 언급돼 있습니다. 몇 년 전 ‘부비부비춤’이란 용어가 제법 인기리에 쓰였지요. 클럽 등에서 남녀가 서로 몸을 밀착시키며 추는 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어릴 때부터 부비다는 말을 써왔으니 이는 아닌 듯. 그리고 비비다보다 부비다가 몸의 접촉이 좀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에 다른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만.


다음은 쓰임의 예입니다.
“아기의 볼이 부드러워 볼을 맞대고 부비고 싶었다”
“겨울 산의 나목(裸木)은 눈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눈꽃 피울 수만 있으면 차가운 몸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다. 눈은 그런 사랑으로 자신을 가꿔줄 그에게 몸을 ‘부비며’ 그렇게 겨울을 보낸다.”

사랑을 아무리 말로 글로 아름답게 표현하더라도 그 절정을 ‘부빔’에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니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다고 하더군요. 손과 손을, 입술과 입술을, 가슴과 가슴을 부벼야 사랑이 완성된다고 하는 주장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따지고 싶진 않습니다만.

“안개가 / 나뭇잎에 몸을 부빈다 / 몸을 부빌 때마다 나뭇잎에는 물방울들이 맺힌다”

안개의 ‘사랑 방정식’입니다. 나뭇잎에 자기 몸을 부빔으로써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안개가 나뭇잎에 몸을 부비면 나뭇잎도 그에 반응을 합니다. 그 작은 입자들을 모아 물방울을 만드는 일.
둘의 사랑은 그런 결실을 맺습니다.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들은 후두둑 후둑 제 무게에 겨워 마치 빗방울 듣는(떨어지는) 소리를 냅니다.

“안개는, 자신이 지운 모든 것들에게 그렇게 스며들어 / 물방울을 맺히게 하고, 맺힌 물방울들은 / 이슬처럼, 나뭇잎들의 얼굴을 맑게 씻어준다”

참된 사랑은 자신을 돋보임이 아니라 자신을 지워감이라 합니다. 그렇지요.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그에게 맞도록 자신을 지워감이라고.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고 합니다. 그래야 하지요. 만약 닮으려 하지 (지우려 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것을 지킨다면 둘의 사랑이 지속될까요?

“안개와 / 나뭇잎이 연주하는, 그 물방울들의 화음(和音)”

안개와 나뭇잎이 주고받은 사랑이 만들어내는 물방울들의 화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소리도 물결도 다 아름답습니다. 겨울 산의 벌거벗은 나무들이 눈을 기다리는 까닭도 마찬가집니다. 아름다운 눈꽃이 피어 나뭇가지의 차가운 몸이라도 따뜻하게 부빌 수 있기에.

“강아지가 / 제 어미의 털 속에 얼굴을 부비듯 / 무게가 / 무게에게 몸 포개는, 그 불가항력의 / 표면장력”

자연 현상인 안개와 물방울의 모습은 강아지 같은 여린 존재가 그보다 강한 어미의 털에 얼굴을 부비며 의지하려는 본능과 같습니다. 무게와 무게에게 몸을 포개면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따뜻하고 편안하다는 역설이 여기에 작용합니다.

“부빈다는 것 // 이렇게 무게가 무게에게 짐 지우지 않는 것”

부빈다는 것은 그냥 자신을 내놓는다는 뜻입니다. 상대를 불편하게 만듦이 아니라 언제나 찾아오게 만드는 쉼터 같은 것처럼. 사랑하게 되면 둘의 개성을 내세움이 아니라 그대와 내가 자신을 조금씩 지워가야 서로에게 스며들 수 있습니다.


<뱀의 발(蛇足)>

김신용 시인의 얘기를 덧붙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요, 소설이요, 시입니다.
14세의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부랑아 생활을 시작하며, 배고파 피를 팔고, 지게꾼, 걸인, 행려병자, 사창가 여인들 등 소위 ‘밑바닥’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감옥도 몇 차례 다녀왔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서울 대학로에서 보도블럭을 깔던 일용직 노동자 시절,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우연히 ‘김선유 시인’을 만납니다. 둘이 얘기를 주고받던 중 자신이 짬짬이 쓴 시가 있다는 얘길 했고, 그가 쓴 시를 읽은 김선유가 마침 계간 [현대시사상]의 창간을 준비하던 ‘최승호 시인’에게 전했습니다.

최승호 시인은 시를 읽자마자 무릎을 쳤고, 1988년 [현대시사상] 창간호에 시 「양동시편 - 뼉다귀집」 외 6편이 실리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어 1988년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을 펴냈을 때 시인의 직업은 공사장 잡부였습니다.
그 뒤 충주시 인근의 시골 마을에 들어가 텃밭을 일궈 먹을거리를 해결하면서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하는 시들을 쓰다가, 지금은 경기도 시흥의 소래벌판에 살면서 시작(詩作)에 전념하고 있답니다.

혹시 올해 한 편의 책도 읽지 않았다면 서점에 가셔서 김신용 시인의 시집 한 권 빼드십시오. 거칠게 살아온 인생이 담겨 읽기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진솔함에 더해진 시적 표현력이 여러분을 끌어당길 겁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