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詩詩한 소통(480)

제480편 : 장석주 시인의 '가을의 시'

* 목우씨의 詩詩한 소통(2026) *


♡ 장석주 시인 편 ♡


- 가을의 시 -


가을이 오면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오래된 연인들을 헤어지게 하고
슬픈 자에겐 더 슬픔을 얹어 주소서.
부자에게선 재물을 빼앗고
학자에게서는 치매를 내리소서.
재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하고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소서.
육상 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그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수도자들과 사제들에게는
금욕의 덧없음을 알게 하소서.
전쟁을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를 써 온 자들은
서정시의 역겨움을 깨닫게 해서
이제 그만 붓을 꺾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집을 찍느라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고요 속에서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는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 [몽해항로](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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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누기>

장석주 시인은 뉴스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습니다. 여러 방송에서 패널로 나오고 EBS에선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왔으니까요. 또 2016년에는 25살이나 어린 제자이면서 시인인 '박연준'과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 대신 책(산문집)을 펴냄으로 혼인신고해 화제가 됐습니다.
제가 부러운 건 25살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한 게 아니라 글방이 있는 안성에 3만 권, 파주 본가에 7천 권의 책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 자기 이름으로 펴낸 책도 100권 가까이 되고, 1년에 5,000매 이상 글을 해마다 써왔다니… 정말 부럽습니다.


시인마다 가을을 글감으로 한 시를 다 썼겠지만 유독 장석주 시인에겐 많습니다. 가을이란 말은 들어 있지 않으나 대표작인 「대추 한 알」을 비롯하여, 「가을 저녁의 말」, 「가을별」, 「가을 법어」, 「가을 병」, 「가을 처사」, 「가을의 초입」 등.
오늘 시를 읽는 순간 좀 의아했을 겁니다. 거꾸로 해야 맞지 않느냐고. 네 그렇습니다. 바로 반어법으로 표현되었으니까요. 반어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본래의 의도나 상황과는 반대로 말하여, 속뜻을 비꼬거나 비판하여 강조하는 수사법입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가을이 오면 / 어제 굶은 자를 하루 더 굶게 하고 / 오래된 연인들을 헤어지게 하고 / 슬픈 자에겐 더 슬픔을 얹어 주소서”
이는 표현 그대로 이뤄지길 바람이 아니라 거꾸로 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 있지요. 즉 ‘가을이 오면 굶주리는 자가 없게 하시고, 오래된 연인들은 결실을 맺게 하시고, 슬픈 사람에겐 슬픔 대신 기쁨을 주소서.’ 하는 뜻입니다.
헌데 이리 표현한 까닭은 현실은 가을이 와도 굶주리는 사람이 여전히 많고, 오래된 연인이 더러 헤어지고, 슬픈 사람은 더욱 슬프게 만드는 일이 잦아진다고.

“학자에게서는 치매를 내리소서”

학자에게 끔찍한 치매에 걸리라고 하다니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니냐고 항의하실 분 많겠지요. 여기서 치매는 영구적인 게 아니라 뒤에 이어지지만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라.’는 뜻을 담았습니다. 즉 잠시 쉬며 판에 박힌 연구 대신 창의적으로 접근해 보라고.

“육상 선수의 정강이뼈를 부러뜨려 /그 뼈와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이 시행 역시 같은 뜻을 담았습니다. 제발 휴식을 취하라고. 손흥민 선수처럼 꼭 필요한 선수는 쉴 틈이 없습니다. 팀에 가서도 주전이요, 국가대표로 와서도 주전으로 뛰어야 하니 쉬지 못합니다. 쉬지 못하면 반드시 고장이 나지요. 그러면 팀에 마이너스가 될 뿐.

“전쟁을 계획 중인 자들은 / 더 호전적이 되게 해서 / 도처에 분쟁과 혁명과 전쟁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런 끔찍한 기도를 하다니, 나 참!’ 하며 혀를 끌끌 찰 분 계실 겁니다. 이 시행도 마찬가집니다. 끝없이 질질 오래 끌 바에야 차라리 이쪽이든 저쪽이든 어느 한쪽이 무너져야 끝날 것 같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끝내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저 무수한 멸망과 죽음들이 / 이 가을에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를 / 부디 깨닫게 하소서”

가을이 주는 풍요함보다 열매가 떨어지고 잎이 떨어지고 마치 죽은 듯이 보이는 이런 현상이 오히려 삶을 이어가게 하는 동력이라고. 때를 아는 나뭇잎은 자신을 붙잡는 나무의 품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해서 영양분이 공급되는 통로를 제 스스로 끊고 바람에 몸을 맡겨 떨어집니다.

가을이 되면 곤충은 다 없어지고 동물도 겨울잠 자는 등 조용해집니다. 이런 무수한 멸망과 죽음이 있기에 다음해 봄을 맞으면 새로운 생명이 되살아나고. 이게 언뜻 비극으로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축복이고 행운이건만 가을의 낭만에만 시선 주면 그런 내면을 볼 수 없습니다.
열매가 떨어져 새 생명이 움트게 되고, 나뭇잎이 떨어져 거름이 되는 원리, 자연은 그렇게 순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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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석주 시인(1955년생) :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75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스스로 ‘문장노동자’라 일컬으며,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기면서 1년에 1만 쪽을 읽고 2,000권의 책을 사 모은다고 함.
지난 목요일(2/19) 배달한 장석남 시인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두 분 이름이 비슷한 데다 꽤 알려진 시인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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