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49)
이즈음 마을길을 돌다 보면 들꽃을 많이 만난다. 이름만 나열해도 취꽃, 쑥부쟁이, 물봉선화... 무리 지어 피어 있어서 그렇지 꽃 하나하나는 작다. 그 녀석들이 작다고 해도 들녘엔 그보다 훨씬 작은 꽃들이 피어 있다. 고마리, 미국쑥부쟁이, 여뀌꽃...
- 취꽃, 쑥부쟁이, 물봉선화 -
취꽃은 ‘취나물 꽃’을 가리킨다. 이름 대면 참취, 곰취, 미역취, 개미취, 수리취 등 여럿이지만 마을길에 만나는 꽃은 참취꽃이 가장 흔하다. 빛깔은 연분홍빛(수리취꽃), 연보랏빛(개미취꽃), 노란빛(곰취꽃, 미역취꽃), 그리고 흰빛(참취꽃)이다.
물봉선화는 가을날 만나는 꽃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가장 좋아한다'는 말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혹 보고 나면 '에이, 아닌데...' 할 사람도 있으리라. 원래 봉선화가 다른 꽃에 비해 좀 수수하지 않은가. 헌데 물봉선화랑 비교하면 봉선화는 화사한 편에 속한다. 그만큼 수수한 시골 아낙을 떠올리는 꽃이다.
연보랏빛 쑥부쟁이는 가을꽃의 대명사인 들국화 가운데서도 사랑받는 순위가 높은 축에 든다. 꽃도 아름답지만 쑥부쟁이 전설을 되새기며 걷다 마주치면 눈길 한 번 더 주게 되는 꽃이다.
요즘 내 눈사랑을 듬뿍 받는 꽃은 취꽃도 쑥부쟁이도 물봉선화도 아니다. 꽃 자체가 하도 작아 가까이 눈을 줘야 제대로 그 모습을 보인다. 앙증맞을 정도로 작으면서도 눈길 쏙 빼앗는 대표적인 꽃들이 바로 고마리꽃, 미국쑥부쟁이, 여뀌꽃이다.
- 고마리꽃 -
고마리꽃은 전에 생활글로 한 번 소개한 적 있다.
달내마을로 이사 간 뒤 처음 맞이한 가을날, 마을 이곳저곳 돌다 만난 이웃 할머니에게 작고 하얀 꽃을 보며 이렇게 물었다.
"할머니 이 꽃 이름이 뭔가요?"
"꽃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에선 그냥 개구리꽃이라고 해요. 길 걷다 보면 그 꽃 속에 숨었던 개구리가 잘 튀어나오니까요."
고마리꽃은 그렇게 ‘개구리꽃’으로 내 머릿속에 남았다.
- 여뀌꽃 -
여뀌꽃은 천연염색의 재료로, 음식의 향신료로, 심지어는 약재로 이용하는 아주 유용한 식물자원이다. 허나 이삭 모양 꽃대에 붉은 꽃이 좁쌀처럼 촘촘히 달린 아주 작은 꽃이기도 하다. 자기를 보아주길 바라며 길가에 붙어 피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거의 모든 들꽃이 시의 글감으로 쓰였는데 불행히도 여뀌를 글감으로 한 시가 거의 없다. 이는 그만큼 관심 밖의 꽃이란 뜻이다. 이리저리 뒤지다 겨우 한 편 건졌다. 백승훈 시인의 「여귀꽃」
“그 옛날
달 밝은 밤이면
도깨비들은
사람을 홀리려고 마을로 내려왔다지
문가에 여뀌꽃 심어놓으면
마을로 내려온 도깨비들이 밤새도록
여뀌꽃송이만 헤아리다가
그만 날이 새어 돌아가곤 했다지
헤아리고 또 헤아려도
다 헤아리지 못한 당신의 마음
붉은 여뀌꽃을 닮았습니다”
여뀌꽃(또는 '여귀꽃')을 제대로 보려면 정말 눈을 꽃에 갖다 대고 보아야 한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 나오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표현 그대로의 꽃이다. 어쩌면 시인이 이 명시를 쓰면서 여뀌꽃을 보고 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꼿꼿이 서서 보아서는 그 고움을 보여주지 않고 고개 숙여 눈을 갖다 대야 보여주는 꽃이니까.
- 미국쑥부쟁이 -
미국쑥부쟁이는 ‘쑥부쟁이’란 말이 붙어있으니 당연히 쑥부쟁이와 닮았다. 정말 크기만 다를 뿐 모양은 흡사하다. 미국쑥부쟁이는 귀화식물로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 말경 춘천시 중도 지방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한다.
그래서 ‘중도국화’라 하거나, 잔털이 많다 하여 ‘털쑥부쟁이’라고도 부르는데, 현재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들꽃이다. 허니까 겨우 50년도 채 안 되었건만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는 말이니 환경부가 생태교란식물로 지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다.
쑥부쟁이와 구분하는 지점은 일단 쑥부쟁이보다 훨씬 작다. 1/4쯤 될까. 그리고 쑥부쟁이가 연보랏빛이라면 미국쑥부쟁이는 대체로 흰빛이다. 미국쑥부쟁이는 접두사 자리에 ‘미국’만 붙었을 뿐 쑥부쟁이만큼 아름답다. 아니 작아서 그런지 더 귀엽고 예쁘다.
허나 나는 미국쑥부쟁이에게서 아픔을 읽는다. 70년대 말에 발견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어릴 때 내가 살던 곳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릴 때 살던 동네 근처 ‘하야리아’란 이름의 미군부대가 있었다. 주변에 양공주가 득실득실했고... 당시에 술집에 나가는 소위 빠걸도 있었지만, 미군들에게 현지처 격으로 사는 양공주도 있었고 그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들을 아이노꾸(혼혈아 낮춤말)라 불렀는데,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때 짝지가 바로 아이노꾸 여자애였기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걔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이 생겼다. 바로 아이 엄마가 사인하면 미국으로 데려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문.
문제는 우리나라 양공주는 데려가지 않고 아이들만 데려간다고 했으니. 그게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 양 정부 정책이었다나.
그때 우리들 누이는 무척 고민해야 했으리라. 아이만 보내느냐 아니면 아버지 없이 우리나라에서 키우느냐. 아마 고민하다 대부분 보냈으리라. 그러니 그곳은 온 동네가 눈물바다. 우리 집 아래 초등동기의 언니도 그런 경우.
위의 얘기는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사람에게 들은 얘기라 100% 정확한지는 모르나 나는 사실이라 믿는다. 그리고 미국쑥부쟁이가 들어온 70년대 말이면 엄마와 강제로 이별해 미국 간 나 또래의 아이노꾸가 성인이 되어 어머니의 나라를 찾아올 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눈에는 미국쑥부쟁이가 미국에서 귀화한 식물이기보단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를 떠났다가 다시 찾아온 꽃으로 보인다. 물론 나의 이런 추론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허나 길가에 아주 낮게 그리고 아주 조그맣게 자라는 그 꽃을 보면 아픔이 저린다.
앙증맞도록 작은 가을 들꽃은 아름다움도 주지만 어떤 이에겐 이렇게 아픔을 주기도 한다.
*. 커버사진은 오이풀인데, 사진 상으로는 실린 쑥부쟁이나 제가 작다고 한 오이풀, 고마리꽃, 미국쑥부쟁이, 여뀌꽃이나 다 크기가 같아 보입니다만 사실 뒤엣것은 허리를 굽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갖다 대야 제대로 보입니다.
*. 오늘 글은 몇 년 전 가을에 올렸는데, 내용을 보강하여 다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