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씨의 '달내마을' 이야기(145)
요즘 달내마을 집을 들어서면 개나리와 수선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는데 바로 입구에서 가장 반갑게 맞이하는 꽃은 바로 명자꽃이다. 도시 아파트로 와서 남천(南川) 내를 한 바퀴 돌 때 가장 화려하게 웃는 꽃도 명자꽃이다. 바야흐로 명자나무꽃 전성시대다.
이즈음 피는 꽃 가운데 저리도 붉은 꽃이 있으랴. 보름쯤 더 지나면 영산홍이 붉은 웃음 터뜨리겠지만 그때까진 으뜸이다. 물론 진달래꽃이 이쁘기는 하지만 붉기로만 따지면 명자꽃에 비할 수 없다. 정말로 붉다. ‘붉디붉은 꽃’이란 표현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이 꽃을 볼 때마다 어릴 때 산동네 살던 시절, 우리 집 아래 살던 그 꽃과 이름이 똑같은 명자 누나가 생각난다. 비록 명자꽃처럼 화려하게 살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 누나는 내 가슴 깊이 아로새겨져 지금도 명자꽃 볼 때마다 아련하다.
우리 동네 명자 누나는 참 예뻤다. 살아오는 동안 직접 마주쳤거나, 또 영상이나 사진을 통해 보았던 수많은 미인을 젖히고 내 기억 속에 남은 오직 한 여인은 명자 누나다.
명자 누나는 나보다 다섯 살 많았다. 누나 아래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초등학교 동기다. 불행히도 이 친구 소식을 모른다. 명자 누나에 대한 영상 기억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끊겼으니 학교를 다녔더라면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텐데, 공부 계속할 처지가 못 되었다.
명자 누나는 얼굴이 갸름하고 목선이 가늘었다. 얼굴도 이뻤지만 목소리도 고왔다. 그때만 해도 덜 알려진 ‘섬집 아기’를 즐겨 불렀다. 가끔씩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면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 하고 조곤조곤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참으로 고았다.
누나의 노래가 들리면 아무리 바쁜 심부름길이라도 발을 멈추고 한 곡 다 끝날 때까지 듣고 갔다. 클레멘타인도 참 듣기 좋았는데. 얼굴보다 목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건 고운 마음씨였다. 언제나 나를 보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넸으니...
추운 겨울날엔 지나치는 내 손을 잡으며 ‘아유, 이 손 봐라. 꽁꽁 얼었네.’ 하며 비벼주었고, 여름날 놀다가 들어오는 길에 마주치면 땀이 삐질삐질 흐르는 뺨을 박가분보다 더 하얀 손수건으로 닦아주었고, 봄가을이면 나를 마을 언덕으로 데리고 가 여기저기 핀 꽃을 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나를 친동생보다 더 아꼈지 싶다.
명자 누나는 늘 볼이 발갰다. 요즘 같으면 '안면홍조'니 '홍반(紅斑)'이니 하는 말을 듣겠지만 그때는 볼이 빨개 더 이뻐 보였다. 특히 웃을 때는 유난히 더 볼이 빨갰다. 우리 엄마가 종종 “저 가시나 참마로 얄궂다. 볼때기가 와 저리 능금보다 더 빨갔노.” 하셨으니까.
친누나가 셋이지만 친누나보다 더 좋아했다. 어린 마음에도 만약 천사가 있다면 바로 ‘명자 누나처럼 생겼을 거야.’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으니까.
명자 누나는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 누나만이 아니라 당시 우리 동네 여자아이들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그건 흉이 아니다. 학교 대신 고무신공장에 다녔다. 그도 전혀 부끄러움이 아니다. 다들 고무신공장 아니면 모자공장, 봉제공장, 가발공장에 다녔으니까.
그런데 명자 누나네 아버지는 술꾼이었다. 술 취해 떠드는 소리가 높아지는 날이면 공장 다니는 누나의 어깨는 축축 내려앉는 듯이 보였다. 거기에 누나네 엄마가 맞상대로 대드는 악다구니가 이중주의 불협화음을 만들 때면 더욱 그랬다. 나를 보면 분명 웃는 얼굴이었으나 어딘지 그늘이 져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엄마가 전해준 청천벽력 같은 말,
“밑엣집 명자가 시집간다 카더라.”
아마도 내가 명자 누나를 좋아하는 눈치인 걸 알아채 던져준 정보이리라. 갑자기 어리둥절해졌다. 고작 열여섯 살인데…
“가수나, 참 안 댔다. 신랭이 지보다 열닷 살이나 위라 카던가…”
그러고 말면 좋았을 텐데 심술궂게 내 속을 긁어놓으려 작정했는지,
“신랭이 돈은 좀 있다 카면서도 지 아부지처럼 앨코올중독자라 카든가, 뭐라 카던데…”
내가 중학교 들어갔을 때쯤 명자 누나는 시집간 뒤 친정에 아주 가끔 왔다. 그럴 때마다 누나 얼굴 보고자 했으나 웬일인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저만치 걸어오는 누나를 보고 또 피할까 봐 전봇대 뒤에 숨었다가 지나치는 누나를 보았다. 아… 엉망이었다, 얼굴이.
흔히 쓰는 ‘눈티가 반티 되도록’ 얻어맞았는지 퉁퉁 부어있었고, 얼굴 가득 상처투성이였다. 그때서야 나를 왜 피했는지 알 수 있었고. 그리고 단순히 알코올 중독자인 줄만 알았던 남편이 폭력까지 행사한다는 소문이 들렸던 때도 그즈음이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친정 온 명자 누나가 죽어도 자기 집으로 가지 않겠다고 버텼던가 보다. 그때쯤 아버진 하늘로 가시고 어머니 혼자 머물렀던 시절이라고 했다. 딸의 모습을 보고 어느 엄마가 보내려 했을까. 아무리 한 번 시집간 딸이 친정으로 도망쳐 오면 내쫓지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말이 돌았지만.
며칠 뒤 저녁을 먹는데 아랫집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나 무슨 일인지 몰라 있다가 계속 나기에 가족 모두 문을 열고 나가보았다. 옷도 엉망진창에다 화가 나선지 술에 취해선지 얼굴이 시뻘건 사내가 몽둥이를 들고 명자 누나를 때리고 발로 짓밟고 있었다.
아버지가 나서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어림없겠지만 당시엔 출가외인이라 하여 남편이 아내 때리는 일이 예사였다나. 한바탕 소동이 일고 결국 명자 누나는 남편에게 질질 끌려 따라가야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던 누나의 뒷모습…
몇 달 뒤 명자 누나가 하늘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하는 말로는 뭘 잘 못 먹어 체해 한의원에 데려갔으나 손 쓸 수 없었다나. 그 말 듣고 대뜸 어머니가 내뱉은 말,
“미친개이 시끼! 먹을 기 머 있다고 체하노. 뚜드려 패서 직였을기라. 미친개이 시끼!”
명자 누나가 하늘로 갔을 때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 누난 열아홉 즈음이었으리라. 스물도 안 된. 그 꽃이 피어 있다. 한 맺힌 명자 누나가 꽃으로 변해. 남천(南川) 내 둑방에도 달내마을 정 아무개 집에도. 명자꽃이 서럽게 웃으며.
*. 주를 달지 않은 사진은 모두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pixabay에서 퍼왔습니다.
*. 제가 금요일 아침에 올리는 글은 현재(2026년 3월 27일) 쓴 글이며, 월~금요일 12시와 토일 7시에 올리는 글은 예전에 올린 글을 다시 싣습니다. 그것은 브런치북을 30개까지밖에 못 만드는 규정 때문입니다. 앞으로 '목우씨의 시시한 소통'을 브런치북으로 만들려면 빈 공간이 있어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