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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Oct 24. 2021

제19화 : '삐용'의 고독

15  '삐용'의 고독


  아침마다 운동 겸 마을 한 바퀴 돌 때 나무와 풀꽃과 바람과 햇살과 함께 하는데, 요즘 꼭 만나는 녀석이 있다.

  아랫마을 내려가는 중간쯤 이르면 농막 형태의 컨테이너에서 개 한 마리가 내다본다. 두세 살쯤 된 성견으로 보이는. 처음엔 화들짝 놀랐으나 목줄에 단단히 묶였으니 일단 마음을 놓았다. 적어도 뛰쳐나와 물 수는 없을 테니까.


  만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녀석도 우릴 관찰하지만 우리도 녀석을 살펴봐 몇 가지 알 수 있었다.

  삐용이 얼굴 보인 지 두 달쯤 되니 두 달 전에는 다른 곳에 있다 여기 왔다는 뜻이다. (임시로 이름을 ‘삐용’으로 지어주었다) 한 번도 오가다 컨테이너 주인을 본 적 없으니 삐용은 주인 없이 홀로 밧줄에 묶여 살고 있는 셈이다.

  몇 가지 경우를 예상할 수 있지만 가장 우선은 아파트에서 키우다 덩치가 커지니 키울 수 없어 거기 데려다 놓았으리라는 생각. 그렇다면 그곳은 몹시 으슥한 곳이라 차는 지나가도 사람은 하루 종일 우리 부부 포함하여 네댓 사람만 볼 정도로 지극히 외로운 곳.

  시골, 그 가운데서도 산골에 살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또래는 거의 없는 데다 설핏이라도 만나는 사람이라야 대여섯 명. 서로 얘기 나누며 지내는 시간을 분으로 모으면 십 분 될까? 정말 외롭다. 굳이 ‘절대고독’이니 ‘견고한 고독’이니 하는 표현을 붙이지 않더라도.



  작년 코로나가 잠시 진정되고 모임이 어느 정도 자유로울 때 예전에 만나던 이들과 함께 한 적 있다. 다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의 인사를 나눌 때 한 사람(남자)이 나를 보더니 이런 말을 던졌다.

  “선생님, 전과 달리 얼굴에 선한 빛이 가득합니다.”

  한순간 기분이 조금 나빴다. 그럼 여태 선하지 않은 악한 얼굴이었단 말인가. 허나 전에는 날카로운 기질이었는데 부드러워졌다는 표현을 했으리라고 받아들였다.

  이번엔 다음 사람(여자)이 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얼굴에 고독이 더 짙어졌습니다.”

  이 말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도 오랫동안 산골살이 했더니 그게 얼굴에도 나타났다는 말 아닌가.



  올 초에 일흔쯤 돼 보이는 낯선 이가 불쑥 우리 집에 나타났다. 작년 말쯤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면서 인사 나눌 겸 왔다고 했다. 반가웠다. 여든 넘은 어르신들과 오십 대 중반의 젊은 사람 말고는 비슷한 나이 또래가 귀하던 차였기에.

  십여 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나에 대한 정보를 다 읽고 난 뒤 그분이 대뜸 하는 말이,

  “아니 이 산골에서 십여 년 동안 외로워서 어떻게 지냈어요?”

  궁금하기도 했으리라. 하루 종일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곳 아닌가.

  “그냥 그냥 지냅니다.” 하자,

  “아, 나는 미치겠어요! 이 외로운 곳에 어떻게 살지... 이제 두 달 됐는데 사람 보기가 고라니 보기보다 어려우니...”

  그 표현에 처음 만나는 자리임에도 ‘팍!’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분은 울산에서 사람 많이 대하는 직업을 갖다가 은퇴 후에 자식들의 부추김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자식들로선 일석이조이리라. 시골이 자기 아이들의 정서에 도움도 되고, 자기들도 휴일에 쉴 곳 생겨 좋고.



  다시 마을 한 바퀴 돌면서 만난 ‘삐용’에게로 돌아가 보자.

  사람만 외로움을 타는 게 아니라 개도 외로움을 탄다. 혼자 남겨져 ‘집 지키는 개’, 즉 ‘집개’는 더욱더 그렇다. 전문가들은 개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심지어 우울증을 앓기까지 한단다.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남겨진 채 일주일이나 보름이나 떨어져 지내는 집개는 보통 두 가지 현상을 보인다. 사람을 보면 몹시도 사납게 짖어대는 개와, 풀이 팍 죽어 사람이 눈에 띄기만 하면 겁먹은 얼굴로 숨어버리는 개로.

  사납게 짖는 개도 홀로 내버려지다 보니 무서워서 그런다고 한다. 즉 너무 무섭기에 역설적으로 사나워진. 겁을 먹고 제 집에 들어가 숨어버리는 개야 당연히 사람이 무섭기 때문이다. 이 무서움 역시 홀로 있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이제 ‘삐용’의 얘기를 해보자. 일단 진짜 이름을 모른다. 그래서 삐용은 내가 붙여준 이름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영화 [빠삐용]에서 감옥 탈출의 달인 ‘빠삐용’의 ‘빠’를 빼고 만든 이름이다.

  삐용의 눈은 늘 고독에 젖어 있다. 아는 이가 내 눈에서 고독을 읽었듯이 나도 녀석의 눈에서 그걸 본다. 지나가면서 손 한 번 흔들어줌에도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사람이 그리웠을 게다. 사람보다 길고양이 고라니 너구리를 더 많이 보았으니.


  삐용의 눈엔 늘 갈망이 어려 있다. 제발 한 번이라도 목줄을 잡고서라도 우리처럼 마을 한 바퀴 돌았으면 하는. 우리가 지나가면 끙 끙 대며 앓는 소리를 한다. 배고파하는 소리일 수 있지만 나는 우리랑 함께 걷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삐용이 씹는 고독의 양은 녀석이 먹는 고기양보다 분명히 많으리라. 아니 고기를 씹지 않아도 이빨은 날카로우리라. 하도 고독을 씹어 대서. 오늘도 저를 지나치는 우리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봄을 안다. 커브를 돌아 그림자마저 사라져도 계속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음도.

  언제 삐용이 잃어버린 ‘빠’를 찾아 빠삐용이 되어 고독을 벗어날 때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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