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아버지의 첫 번째 직업 '똥 퍼'
제3화 : 첫 번째 직업 '똥 퍼;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부산의 중심지 서면에서 차로 5분,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곳이라면 제법 번화가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기 좋다. 그리고 그 선입견은 지금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어릴 때 내가 자라던 그곳은 고급 아파트단지가 조성돼 있고, 조금 더 떨어진 성지곡수원지라는 곳은 어린이대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일 년 내내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살던 산동네 바로 옆 골짜기를 ‘똥골’이라 불렀다. 부산이 지금처럼 거대도시가 되기 이전엔 농사짓는 곳도 많아 통시(변소)에 똥이 차면 밭에 가 뿌리면 그만이었으나 인구가 늘어나고 논밭이 줄어들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버릴 곳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 데나 버릴 수 없게 되면서 생겨난 직업이 바로 ‘똥 퍼’였다. 아직 똥차가 다니기 전이라 적당히 버릴 곳도, 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똥을 치워주는 그 일은, 마땅한 직업이 없는 이들이 일거리를 찾다 찾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거였다.
‘똥 퍼’ 아저씨의 작업도구는 아주 간단하다. 푸는 도구 똥바가지와, 그걸 담는 도구 똥통과, 져 나르는 도구 똥지게, 이 셋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아저씨는 그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거둬들인 똥들을 동네에서 떨어진 골짜기로 갖다 버린다. 그 골짜기가 시나브로 똥으로 뒤덮이면 ‘똥골’이 되고, 다시 그 냄새가 바람을 타고 마을까지 밀려들면 그 마을은 절로 ‘똥골동네’가 된다.
지게에다 통을 걸고 바가지를 든 아저씨가 떴다 하면 아이들이 어느새 모여든다. 원칙적으로는 ‘똥 푸세요!’ 하고 네 마디로 소리 내야 했으나 외기 좋고 듣기 좋게 줄여 두 마디로 ‘똥 퍼!’ 하고 외치면 아이들은 그 말을 받아 “안 퍼!” 하고 놀려댄다.
웬만큼 사업(?)이 되는 날이면 아저씨는 아이들의 그 소리를 그냥 귓가로 흘려버리나, 사업이 안 될 때 그럴라치면 지게를 내려놓고 꼬마들을 잡으러 온다. 그러면 달아나고…. 운 나쁘게 잡힌 꼬마들은 크게 혼난다.
그때 나는 여덟 살 무렵이라 아버지의 직업을 몰랐다. 다만 매일 아침 일찍 일 나갔다 저녁이면 돌아오는 모습만 보았을 뿐. 아마도 단벌이었을 양복을 입고, 단 한 켤레인 구두를 신고, 챙이 좁은 우묵모자(중절모)를 쓴 채 밤새 집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자전거를 몰고 나오면 나와 동생은 마치 사열식 검열을 받듯 대문 양쪽 옆에 서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고. 그러면 “오냐.” 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 아 아버지의 자전거!
반백년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그 시절에 아버지가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의 자전거는 고급도 아니고 새것도 아니고 돈을 주고 산 건 더더구나 아니었다.
뒷날 엄마에게 들은 얘기로는 도무지 쓸 수 없어 누가 버린 걸 갖고 와 여러 자전거점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부품을 얻어다가 완전히 새로 고쳐 만든 자전거였다.
처음 운전할 때 아버지의 긴장하던 모습과 굴러갈 때 흐뭇해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비록 사흘 드리 가다가 멈춰 선 자전거였지만 아버지는 끔찍이도 그 자전거를 사랑했다.
딸 셋 아래로 다섯 자식 잃고 늘그막에 얻어 귀염 받은 우리 형제였건만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손을 못 대게 했다. 평소에도 엄격했지만 한 번 화나면 벼락 떨어지는 분의 영이라, 자전거는 우리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아버지는 날이면 날마다 손질했다. 못 써 버려 놓은 걸 고쳐선지 이내 늘어지는 체인을 죄고, 뻑뻑한 핸들도 거듭 돌려 자연스럽게 만들고, 새어나가는 타이어에 날마다 바람을 넣고….
뿐이랴, 겉은 또 얼마나 곱게 손질했던가. 바큇살과 바퀴축은 기름걸레질로 광을 내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머릿결에 바르는 오래된 포마드는 녹 방지용으로 썼으니 ….
양복 입고 구두 신고 우묵 모자를 쓴 채 자전거를 몰고 출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기름때 잔뜩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나가는 다른 애들의 아버지랑 비교할 때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허구한 날 엄마가 양복을 다리면서 내뱉는 “마 기냥 대는 대로 입고 가지. 머 대단한 일 한다꼬.” 하는 짜증소리를 들을 때마다, ‘왜 저런 말을 하지.’ 하며 엄마에게 눈 흘겨주다가 닦아놓은 아버지의 구두를 다시 한번 손질하는 그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아버지의 일 나가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으나 돌아오는 시간은 한결같지 않았다. 그래도 한 시간 정도의 오차만 있을 뿐이라 나와 동생은 아버지를 마중 나갔다.
언제나 아버지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자전거를 타고 내려왔다. 그 길로 올라가면 숯막이 있고, 거길 더 지나 한참 가도 산마을만 나올 뿐 공장이라 이름 붙일 곳이 없는데도 아버지는 매일 그곳을 통해 내려왔다. 일 나갈 때처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그대로 양복 입고, 구두 신고, 우묵 모자를 쓰고, 자전거 탄 그 모습으로.
아버지는 우리를 보면 속도를 줄인다. 그러면 우리들은 그 뒤를 뛰다시피 따르고. 그 시간이 얼마나 즐겁던지. 특히 가을날 해 저물 무렵, 마지막 남은 햇살이 구름을 살포시 피하며 비스듬히 쓰다듬는 길을 따라 달릴 때면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직업을 알게 된 건 그 일을 그만둔 지 십여 년이 지나 내가 대학교 다닐 때였다. 우연히 친정에 들른 누나가 무심코 내뱉은 말을 캐물어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충격이란!
사실 ‘똥 퍼’ 아저씨가 “똥 퍼!” 하고 손님을 부르면 꼬마들이 졸졸 따라다니며 “안 퍼!” 하며 놀릴 땐 나도 그렇게 했다. 아니 누구보다 더 신나게 즐겼다. 그런데 아버지가 바로 그때의 아저씨였다니….
아버지는 쉰이 다 돼 얻은 아들 둘을 키우기 위해 뭐든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게다.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깜깜무식에, 시골에서 쫓겨나다시피 무작정 도시로 나와 특별한 기술을 익히지도 못해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어 하다하다 못해 선택한 일이었을 터.
그나마 자식들에게 그런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우리 동네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다른 동네로 갔을 테고. 가까운 동네에서 일하면 단골 확보도 수월코 갖다 버리는 곳도 가까워 훨씬 편했을 텐데도 그리 한 건 아마도 자식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아버지는 또 가족들이 눈치챌까 봐 늘 한결같은 시간에 양복 입고 구두 신고 우묵 모자를 쓴 채 자전거를 타고 출근했으리라. 그런데 ‘똥 퍼’일은 그런 차림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었다.
그래 훗날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어머니에게 물어봤다. 당신도 한동안 아버지의 직업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돈 벌러 간다는 한 마디였고, 돈 벌어다주면 그뿐이라 여겼고. 그런 중에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으나 사람 입으로 옮겨지는 소문에 결국 들키고 말았으니….
당시 엄마에게 가장 궁금했던 게 옷이었지 싶다. 양복 입고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옷으로 일했다면 냄새가 배어 심하게 풍겼을 텐데 어쨌냐고? 모든 답은 산속 숯막에 있었다.
거기 주인과 안면을 튼 아버지는 일 나가면서 거기 들러 옷을 갈아입고 도구를 챙겨 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갈아입었는데, 숯막이다 보니 늘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어 몸의 냄새를 없앨 수 있었단다.
솔직히 아직도 아버지의 그 시절 직업은 부끄러움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그 일을 떳떳이 이야기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했던 그 직업을. 그러면서 날마다 깨끗한 차림으로 일터로 향해야 했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썼던 그 마음을 생각한다. 그러면 어느새 아버지의 자전거가 떠오른다. 산의 숯막을 내려오는 길에 자전거 살대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따스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