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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Dec 21. 2023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3)

제23편 : 신기섭 시인의 '뒤늦은 대꾸'

@. 오늘은 신기섭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뒤늦은 대꾸
                                       신기섭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방.
  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
  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
  내내 함께 있어준 후배는 아침에 서울로 갔어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
  밥구경도 다 했다. 아쉬워하며 떠난 후배
  보내고 오는 길에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
  불현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 기습아,
  이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생각이 나, 그때는 내가 할 수 없었던,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큰소리로 해보는 대꾸 : 그럼요,
  할머니, 나 혼자서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몇,
     - [분홍색 흐느낌](2006년)

  #. 신기섭 시인(1979년생) : 경북 문경 출신으로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그 해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다음 해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이 나옴

  <함께 나누기>

  시 해설에 앞서 시인 소개부터 합니다.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로 여겨.

  신기섭 시인은 앞에서 보다시피 만 26세의 나이로 하늘로 갔습니다. 그것도 등단한 지 일 년도 채 지나기 전 그 해 겨울에. 시집도 펴내기 전이라 친우들이 문예지에 발표한 시와 미발표 원고를 모아 유고시집을 만들었는데, 오늘 배달하는 시는 미발표 원고에서 뽑은 시입니다.

  시인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고 하는데 특히 할머니는 엄마 역할을 했답니다. 그래서 시 가운데 할머니에 대한 글감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처럼 지독하게 가난함을 겪으며 봉천동 언덕배기 옥탑방에서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
  얼마나 돈이 없었든지 [한국일보] 신춘문예 담당자가 당선 사실을 알렸을 때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상금을 당겨서 지급받을 수 없겠느냐고... 주인이 이사를 하라고 하는데... 옮길 전세금이 없어서...'

  시로 들어갑니다.

  살아계실 때 할머니에게 드려야 했던 대답을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답을 합니다. 그러니 제목이 [뒤늦은 대꾸]가 되었습니다.

  “불현듯 오래 전 당신이 하신 말씀 : 기습아, / 이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할머니는 당신이 떠나고 나면 혼자 남는 어린 손자가 걱정되었겠지요. 그러니 내 없어도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테고. 아마도 어릴 때 들려주었음직한 말씀인데 그때는 철이 안 들어 답을 못했지요. 그런데 나이 들고 할머니가 먼 길 떠나고 나니 새삼 생각이 났습니다.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 큰소리로 해보는 대꾸 : 그럼요 / 할머니, 나 혼자서도 살 수 있어요”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용기 있는 발언.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했으면 더 편히 눈감았을 텐데. 허나 이제는 듣는 이 없어 허공으로 사라져 갈 뿐.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발이 눈치 없이 날립니다. 할머니 안 계시니 숭숭 뚫린 가슴으로 그 눈발은 파고 또 파고들고...

  오늘 이 시 읽는 그대 가슴으로 숭숭 스며드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몇'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 눈발 날리는 곳도 있을 거구요. 허허로운 우리네 가슴에 눈발이 날립니다. 요절한 시인의 마음이 우리네 심장을 살며시 두드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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