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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Dec 24. 2023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5)

제25편 :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 오늘은 정일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판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2003년)

  #. 정일근 시인(1958년생) : 경남 진해 출신으로 1984년 [실천문학]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중학교 교사로, 신문사 기자로 근무하다 모교인 경남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지금은 산골마을에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와 동시를 쓰며 경남대학교 석좌교수로 있음.


  <함께 나누기>

  두레밥상(두레반, 두레판)은 시골에서 농사를 공동으로 하기 위한 자생 조직인 ‘두레’와는 다릅니다.
  표준어로는 ‘두리반’이라 하는데,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가리킵니다.

  어릴 때 우리 집 밥상은 셋으로 나뉘었습니다. 큰상 하나는 아버지 혼자 차지였고(주요 반찬의 대부분 놓임), 작은 상에는 저와 남동생이, 누나 셋과 어머니는 신문지 위에 밥과 반찬을 놓고 먹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사각밥상 하나만 놓였는데, 그때도 앉는 자리는 정해져 있었습니다.
  아랫목 가장 넓은 자리에 아버지가, 맞은쪽에 저와 동생이, 한쪽은 비워둔 채 문 가까이에 누나 둘이, 그리고 어머니는 역시 신문지 위였습니다.

  중학교 다닐 땐가 스텐으로 된 두리반이 놓이면서 다섯 식구 - 막내누나만 남아 -가 빙 둘러앉아 먹었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식탁의 민주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즉, 특별한 반찬이 아버지 앞에만 놓일 수 없었고 그즈음에는 누구나 다 같은 반찬을 골고루 섭취하게 되었다고 해야겠지요.

  그러고 보면 사각으로 모가 난 사각밥상에는 상석이 있고 앉는 서열이 있습니다만 둥근 두레밥상엔 상석이 따로 없고 모든 자리가 다 상석이 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사각으로 모난 밥상과 둥근 두레판이 대조가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점은 사각밥상도 어머니가 차린 밥상이요, 둥근 밥상도 어머니가 차린 밥상입니다.
  그런데 왜 두레밥상만이 어머니의 밥상이라 했을까요? 바로 거기에 자식을 향한 차별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암시하기 때문이겠지요.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두레판의 둥근 모습은 원만함과 조화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사각처럼 모가 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즉 어머니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이 실현되는 세상을 꿈꾸는 시인의 마음이 담다고 해야겠지요.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이제 시에서 밥상이 단순한 밥상을 가리키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바로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몸을 던지는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배려와 조화는 전혀 없고 오직 싸움(경쟁)뿐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사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얼마나 각박한 삶의 현장인지요. 오직 나(내 가족)만 더 잘 살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함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이 비극의 현실.
  그래서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 같은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아야' 했습니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살기 위해 비굴한 짓도 해야 했고, 살기 위해 남을 해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경쟁과 탐욕으로 살아온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밥그릇 싸움만이 생존의 유일한 방법인 양 알고 치열하게 쫓아갔던 그 이기적인 삶. 어머니의 마음을 잃었던 삶.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이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으로. 나만이 아니라 '함께 함의 소중함'을 일깨워줬던 그 어머니의 사랑으로.
  나만 귀하지 않고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모두를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그 어머니의 사랑으로.

  끝맺으려 하다가 가만 생각하니 우리 고유의 전통인 '두레'와 '두레밥상'이 다른 게 아님을 깨달음도 뜻밖에 얻은 수확입니다.

  *. 두레밥상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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