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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an 0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39)

제39편 : 오탁번 시인의 '운수 좋은 날'

@. 오늘은 오탁번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운수 좋은 날
                                오탁번

  노약자석엔 빈자리가 없어
  그냥 자리에 앉았다
  깨다 졸다 하며
  을지로 3가까지 갔다
  눈을 뜨고 보니
  내 앞에 배꼽티를 입은
  *배젊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하트에 화살 꽂힌 피어싱을 한
  꼭 옛이응 ㆁ 같은
  도토릿빛 배꼽이
  내 코앞에서
  메롱메롱 늙은 나를 놀리듯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렸다
  전동차 흔들림에 맞춰
  가쁜 숨을 쉬는
  아가씨의 배꼽을 보면서
  나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그 옛날 길을 가다가
  아가씨를 먼빛으로 보기만 해도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내 청춘이 도렷이 떠올랐다
  공짜로 지하철을 타고
  맨 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은
  참말, 운수 좋은 날!
  - [우리 동네](2010년)

  * 배젊다 : '두 배나 젊다' 또는 '아주 젊다'

  #. 오탁번 시인(1943년~2023년) : 충북 제천 출신. '67년 [중앙일보]에선 시인으로, '69년 [대한일보]에선 소설가로 등단.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직했으며, 아내인 김은자 시인 역시 한림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직한 부부 시인. 안타깝게도 작년 2월 부음 소식을 전했습니다.




  <함께 나누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 누구냐?' 하고 묻는다면 참 답하기 난처합니다. 물론 저로선 한 명 댈 분 계시지만. 허나 질문을 바꾸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재미있는 시를 쓰는 시인이 누구냐' 묻는다면 단박에 대답합니다.
  ‘오탁번’
  「폭설」, 「굴비」, 「차일(遮日)」,  「해피 버스데이」... 참 많은 작품이 우리를 웃게 만들었지요. 그래선가요, 어떤 평론가는 이리 말했지요. 아마 조선 시대 태어났으면 김삿갓과 쌍벽을 이루는 해학 시인이 되었을 거라고.

  요즘은 마치 옆에서 이야기하듯 쓴 시라 하여 ‘이야기시’라는 하위장르를 만들어 쓴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탁번 시인은 '이야기시'를 쓰신 분이 분명합니다. 배달하는 사람 입장에선 이런 시가 참 고맙습니다. 애써 깊이 공부 안 해도 되니까요. ㅎㅎ

  시로 들어갑니다.
  읽으면 술술 넘어가는 시라 꼼꼼히 분석하지 않고 대충 뭉뚱그려 봅니다.

  이 시 담은 시집이 2010년 나왔으니 실제로는 그보다 몇 년 전 발표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미투 논란이 한창이던 2018년 때와는 관계 없습니다. 만약 그 이후에 썼다면 이 시를 발표했을까, 발표했다면 비난받지 않았을까 하고 자못 궁금합니다.
  남성이 볼 때 여성은 몸 전체가 매력 덩어리입니다. 몸의 어느 부위도 그냥 지나쳐버릴 곳이 없습니다. 발가락도 성적 패티쉬 대상입니다. (한때 음란소설 썼다 하여 구속된 마광수는 글에서 '발가락 패티쉬'를 강조했지요)

  '어깨'도 성과 전혀 관계 없는데 버스 지하철에서 무심코라도 젊은 여자의 어깨를 툭 치면 큰일납니다. 사람 많이 다니는 곳에서 실수로 지갑 등을 떨어뜨리고 주울 때 고개 들다 하필 여인의 다리를 보게 되면 당장 치한으로 몰립니다.
  시에서처럼 한창 때의 아가씨들이 배꼽티를 입고 다닙니다. 제가 꼰대라 왜 그런 옵 입는지 이해 안 됩니다만. 태어날 때 탯줄 연결해 준 기능 말곤 다른 역할 하리라곤 상상 못했건만 성적 매력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아마 시인도 지금 지하철을 탄다면 절대로 아가씨 배꼽티를 빤히 보는 그런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눈 감고 자는 척해야겠지요. 저는 멀미 현상으로 차만 타면 (운전 제외) 졸음이 와 잠듭니다. 그러니 치한으로 몰릴 위험은 덜합니다.
  시를 읽고 난 뒤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늙은이가 배꼽티 입고 앞에 선 아가씨를 보며 속으로 생각하는 모습에 ‘음흉한 늙은이네!’ 해도 되고, 또 노인의 모습을 천진난만하게 보아 젊은 시절의 본능을 은근슬쩍 보여줘 자연스럽게 웃음을 짓게 하는 작품이라 평가해도 됩니다.

  모든 평가는 읽는 이의 몫입니다. 다만 시인이 단순히 재미 있으라고 지은 작품은 아닙니다. 표현이 뛰어난 부분 보며 '역시!' 하며 무릎 쳤습니다.  
  "꼭 옛이응 ㆁ 같은 / 도토릿빛 배꼽이"
  "늙은 나를 놀리듯 / 멍게 새끼마냥 옴쭉거렸다"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 들끓는 야수를 눌러야 했던"
  "맨 입으로 회춘(回春)을 한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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