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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an 15.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4)

제44편 : 이건청 시인의 '그리움에 대하여'

@. 오늘은 이건청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그리움에 대하여
                                이건청

  산초 열매를 터뜨리면
  잊혀지지 않으려는
  그리움처럼,
  진한 향내가 사람을 감싼다.
  아주 먼 곳의
  산굽이 길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지워지지 않으려는
  그리움처럼,
  며칠 후
  산초 열매 장아찌는
  식탁에도 오르겠구나,
  그래, 그래, 우리 모두
  그리움의 향내
  아련한 식탁에 앉으리니,
  산초 열매여,
  우리 여생의 길도
  그리움의 향기 아찔한
  저 풀섶 쪽으로
  아득히, 멀리
  열려 있기를…….
  - [곡마단 뒷마당에 말이 한 마리 있었네](2017년)
  

  #. 이건청 시인(1942년생) :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김소월’, ‘정지용’, ‘박목월’로 이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평가받았으며,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계시다가 퇴직




  <함께 나누기>


  입맛이 없을 때 꺼내먹는 반찬으로 산초장아찌만 한 찬이 또 있을까요? 입에 넣는 순간 다른 맛을 빼앗아 버리는 그 톡 쏘는 맛. 다행히 우리 집엔 아내가 부지런해 산초 장아찌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젓가락 들고 이리저리 방황할 때쯤이면 산초 장아찌를 꺼내옵니다.
  사람에 따라선 향이 너무 강렬하여 싫어하는 분도 계시지만 일단 맛 들이면 거기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다만 다른 맛을 지우니까 맛있는 반찬 있을 때는 굳이 꺼내놓지 마시길. 입맛 잃어갈 때 몇 젓가락만 오르내려도 금방 입맛 찾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산초 열매를 터뜨리면 / 잊혀지지 않으려는 / 그리움처럼, / 진한 향내가 사람을 감싼다"
  가끔씩 이런 표현 만날 때마다 감탄 터뜨립니다. '산초 열매'와 '그리움'을 엮어가는 이런 표현에 시 읽는 맛을 느낀다고 할까요. 특히 가을날 산초열매를 따러다니는 우리 부부 같은 경우엔 더욱 가까이 다가옵니다. 옷깃을 살짝 스치기만 해도 강렬한 산초 향기가 옷 속을 파고드니까요.

  "아주 먼 곳의 / 산굽이 길 하나가 / 파르르 떨린다 / 지워지지 않으려는 / 그리움처럼"
  시인이 산초 향기와 그리움을 어찌 엮을까 하고 궁금했는데 그리운 사람 떠나니까 그(그녀)가 걸어간 길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고 합니다. 차마 발길 안 떨어지는 애틋함을 보여주듯이. 한 번 새겨진 산초 향은 지워지지 않듯이 그대가 내게 남기고 간 향기도 그대로 남습니다

  "며칠 후 / 산초 열매 장아찌는 / 식탁에도 오르겠구나 / 그래, 그래, 우리 모두 / 그리움의 향내 / 아련한 식탁에 앉으리니"
  비록 그는 떠났지만 함께 담은 산초 장아찌. 그는 떠나도 향기는 남아 곁에 머뭅니다. 마치 한용운 선사의 [님의 침묵]에 나오는 구절처럼.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이러면 그는 가지 않고 식탁에 함께 마주앉아 밥 먹는 기분을 느낄 듯.

  "산초 열매여, / 우리 여생의 길도 / 그리움의 향기 아찔한 / 저 풀섶 쪽으로 / 아득히, 멀리 / 열려 있기를..."
  이제 시인의 나이만큼 저도 나이 먹었습니다.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시간보다 지나간 시간의 그림자를 들출 때가 많아졌다는 말이지요. 오래 전 둘이 쌓았던 그리움의 탑은 함께 했던 시간들의 보상인 양 시계의 태엽을 옛날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리움이 많이 남았다는 말은 삶이 그만큼 풍부했다는 뜻이요, 사랑과 추억이 물밀 듯이 솟아오른다는 말이겠죠. 오늘 산초 향기 남기고 떠나간 그 사람을 잠시 생각하는 시간 갖기를. 진하디 진한 그 향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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