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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an 16.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45)

제45편 : 심보선 시인의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

@. 오늘은 심보선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
                                            심보선

  태양
  오른쪽
  레몬 향기
  상념 없는 산책
  죽은 개 옆에 산 개
  노루귀꽃이 빠진 식물도감
  종교 서적의 마지막 문장
  느린 화면 속의 죽음
  예술가의 박식함
  불계(不計) 패
  변덕쟁이들
  회고전들
  인용과 각주
  어제의 통화 내용
  부르주아 대가족
  불어의 R 발음
  모교의 정문
  옛 애인들(가나다 순)
  컨설턴트의 고객 개념
  칸트의 물(物) 자체
  물 자체라는 말 자체
  라벤더 향기
  아래쪽
  토성
  - [슬픔이 없는 십오 초](2008년)

  #. 심보선 시인(1970년생) : 서울 출신으로 대학 재학 중인 199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이 시인에게 붙은 별명은 ‘귀공자 시인’입니다. 시 잘 쓰고 멋진 외모의 젊은 시인.
  사회학을 하는 ‘좌뇌’와 시를 쓰는 ‘우뇌’가 공존한다는 말을 들으며, 현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전임교수


  <함께 나누기>

  환멸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꿈이나 기대나 환상이 깨어짐, 또는 그때 느끼는 괴롭고도 속절없는 마음’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환멸의 뜻보다 환멸 이전 상태를 중시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어떤 사물을 좋아하거나, 어떤 일에 빠졌다가 그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이 환멸이니까요.

  오늘 시인이 죽 늘어놓은 환멸로 이끄는 여러 요소들을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봐야 하겠지요. 시인을 환멸로 이끄는 요소 가운데 누가 봐도 쉬 동의할 내용도 있지만 너무 주관적이라 무슨 뜻인지 몰라 동의 못할 내용도 있습니다.
  오늘 시는 그 하나하나를 파헤침도 중요하지만 나에게는 저 시어가 어떤 뜻으로 다가오는지도 생각해 보시길.

  어떤 사람을 사랑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를 미워할 때가 오고, 어떤 일을 좋아했다가도 그 일을 환멸하게 하는 순간도 옵니다. 아마도 그에 대한 사랑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환멸은 더 깊어지겠지요.

  시로 들어갑니다. (다만 아래 분석은 시인의 의도가 아니라 제가 보는 시각입니다)

  태양 : 한때 태양은 나의 모든 것이며 사랑이었다.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 늘 자리했으니까.
  그러다 시골로 옮겨오면서 바뀌었다 나날이 시커멓게 변하는 얼굴. 기미가 점점이 박혀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게 만들었으니까.

  오른쪽 : 나는 오른손잡이다. 어릴 때 사촌형님이 미군에게 얻었다면서 야구 글러브로 갖다주었다. 문제는 왼손잡이용이라는 것.
  좌측통행이 몸에 밸 무렵 갑자기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채 정착되기 전 산을 오르다 지적받았다. 왜 오른쪽으로 가지 않느냐고.

  레몬 향기 : 아는 이의 딸 결혼식에 갔다가 여럿이 한 테이블에 앉아 식사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이 접시를 내려놓자마자 모든 음식에 레몬즙 뿌리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한 마디,
  "나는 모든 음식에 레몬 안 뿌리면 맛이 없더라. 심지어 김치에도 뿌리고 싶다니까". 그 뒤 레몬이 갑자기 싫어졌다.

  죽은 개 옆에 산 개 : 두 개가 짝을 이루는 사이였다면,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뒤 내가 그 빈자리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면.

  노루귀꽃이 빠진 식물도감 : 봄의 전령사로 복수초와 노루귀를 든다.
  허나 복수초는 눈 속에 핀 노란 꽃이 예뻐 사랑받지만 노루귀는 그렇지 못하다. 관심에서 멀어진 것만 해도 억울한데 아예 꽃 취급받지 못한다면.

  종교 서적의 마지막 문장 : 구원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마지막 구절을 믿었지만,
  날이 가고 죽을 때가 다 돼도 구원의 메신저는커녕 절망적 상황만 겹쳐질 때.

  느린 화면 속의 죽음 : 죽음 장면은 빠르게 처리되기를 원하나 관객의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영화에선 느리게 처리한다.
  그럴수록 죽음은 더욱 다가들고. 마치 친한 이의 죽음처럼 느껴지게 만든다면.

  예술가의 박식함 : 시인은, 화가는, 음악가는 예술 자체에 충실해야지 이론 부문에 너무 깊이 빠져선 안 된다.
  시인이 시론(詩論)에 너무 집착하면 시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말 있다. 그만큼 예술가가 그 분야에 박식하면 창작엔 도움 안 된다.

  불계패 : 바둑에서 끝까지 둔 뒤 계가(計家)하지 않고 중간에 거둘 때 불계패라 한다. 불계패는 일종의 '항복패'다.

  변덕쟁이들 : 생략(너무 많으므로)

  회고전들 : 회고전은 자신이 살아온 발자취를 보여주는 서술이다. 여기엔 진실을 담아야 하나 대부분 미화되어 기술하기에.

  인용과 각주 : 논문에선 인용과 각주가 필수다. 그런데 인용과 각주가 너무 많아 자신의 의견과 주장이 묻힌다면.

  어제의 통화 내용 :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전화했는데, 하고 나니 상대의 기분 거슬리지는 않았는지 후회하게 된다면.

  부르주아 대가족 : 재벌 집안 자식은 양날의 칼이다. 많은 재산 물려받아 부자로 사는 건 좋지만 그게 족쇄로 작용하기도 하므로.

  불어의 R 발음 : 프랑스 영화 보면서 거기 나오는 프랑스어가 멋있어 배우고자 하다가 가장 먼저 가로막는 발음이 R 발음이다.
  문제는 R 발음이 프랑스어에서 약 13%의 빈도로 가장 많이 발음되기에 이를 빠뜨리고는 들어갈 수 없다.

  모교의 정문 : 들어갈(입학) 때와 나올(졸업) 때 마음은 다르다. 들어갈 때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나올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옛 애인들 : 이별한 옛 연인은 시간 지나면 추억이 될지 모르나 이별하게 만든 그 요인을 떠올리면 환멸하게 되니까.

  컨설턴트의 고객 개념 : 고객에게 펀드 가입하게 할 때는 기분 좋으나 반대로 돈을 내줘야 할 때는 기분 안 좋다. 또 컨설턴트에게 있어 고객은 사람이 아니라 돈일뿐이다.

  칸트의 물자체와 물자체라는 말 자체 : 물자체의 뜻이 너무 모호해 뜬구름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물자체의 개념 없이 칸트 철학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물자체의 개념을 가지고서는 칸트 철학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라벤더 향기 : 지극히 개인적이긴 하나 라벤더 향기를 맡으면 그냥 머리가 아프다.
  인터넷엔 라벤더 오일이 두통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그러는데, 나는 오히려 맡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니까.

  아래쪽 : 아래쪽을 '어려운 이웃들'로 본다면 그들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는 마음 한 구석에 '내가 왜 그들 도와야 돼?' 같은 마음이 들 때 나를 환멸로 이끈다.

  토성 : 태양계의 위성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별이 토성이다. 아름다운 고리를 가졌기 때문에. 남들이 다 좋아하기에 환멸을 느끼게 됐다는 뜻인지.

  오늘 이 시를 배운 김에 '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 가지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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