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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an 31.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56)

제56편 : 강영란 시인의 '저 봄'

@. 오늘은 강영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저 봄
                         강영란

  나는 아버지가 저 봄 놓으라 말하는 게 좋았다
  *조붐, 저붐, 제까락이라고 한 번씩 다르게 말해도
  나는 저 봄이라고 알아듣고
  젓가락을 식구 수 대로 밥상 위에 착 착 놓았다

  짝이 안 맞아 저 봄은 양은 밥상 위에서
  또독 말발굽 소리를 한 번 내어야 하지만
  그때마다 밥상 위에 새겨진 꽃 그림 속을
  말발굽이 지나가는 것 같아서 참 좋았다

  아! 저 꽃 핀 봄에
  저 봄이 식구 수 대로 말발굽 소리를 내면
  또독 또독 또독 또독

  목단인지 작약인지 모를 꽃 그림 속을
  천천히 다닐 수 있어 좋았다
  잊히지 않는 아버지
  저 봄날에 보고 싶어 좋았다
  - 웹진 [시인광장](2022년 4월호)

  *. 조붐 : 원래 표기엔 'ㅈ' 아래 'ㆍ' 붙었으나 밴드에선 표기 불가능함
  *. '조붐, 저붐, 제까락' : 모두 ‘젓가락’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


#. 강영란 시인(1968년생) :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와 2010년 [열린시학]을 통해 등단.

  현재 제주도에 감귤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시 속에 제주의 문화를 담은 내용이 많음



  <함께 나누기>


  강영란 시인은 아는 이가 적습니다. 제주도라는 문학 변방에 사는 데다 직접 감귤 농사를 지으며 사는 농민 겸 시인이기 때문이지요. 저도 5년 전에야 겨우 알게 된 뒤 해마다 계속 배달합니다. 그만큼 제주를 노래한 좋은 시를 많이 쓴 시인입니다.

  이 시인은 제주도 방언을 시에 자주 등장시킵니다. 몇 년 전 배달한 '요자기'가 그렇고 오늘 시 '저 봄'도 그렇습니다. 제주도 방언인 '요자기'는 '요즈음'을 뜻하고, 젓가락이 시적 형상화 과정을 거쳐 '저 봄'이 되었습니다.


  하기야 지금도 전라도와 강원도에선 젓가락을 '저분'이라 한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하실 겁니다. 그러니까 '저분', '저붐'이 지역민들이 쓰는 방언이라면, ‘저붐’에서 '저 봄'을 이끌어 냄은 시인의 창조 역량으로 봐야겠지요.


  시로 들어갑니다.


  “나는 아버지가 저 봄 놓으라 말하는 게 좋았다”

  첫 행에서 ‘저 봄’이 우리가 익히 아는 봄을 가리키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봄을 놓는다’는 표현을 하지 않으니까요. 아버지는 실제 ‘조붐’ ‘저붐’이라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저 봄'으로 알아듣곤 젓가락을 식구 수대로 밥상 위에 착착 놓습니다.


  그럼 왜 화자는 ‘저붐’을 ‘저 봄’으로 알아들었을까요? 다양한 풀이가 가능하지만 봄이 희망을 상징하니 그렇게 볼 수 있고... 끝까지 읽으면 드러납니다만 화자의 아버지가 먼 길 떠난 계절이 봄이라서 그리 했다고 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봄은 아버지와 동격인 셈이지요.


  “짝이 안 맞아 저 봄은 양은 밥상 위에서 / 또독 말발굽 소리를 한 번 내어야 하지만”

  양은으로 만든 밥상에 저붐(젓가락) 놓으면 짝이 맞지 않아 소리가 납니다. ‘젓가락 짝이 맞지 않다’에서 화자네 가정 형편이 슬쩍 드러납니다. 허나 우린 알고 있지요. 가난을 드러냄이 아니라 그런 소박한 분위기에서 오는 정겨움을 뜻한다고.


  “그때마다 밥상 위에 새겨진 꽃 그림 속을 / 말발굽이 지나가는 것 같아서 참 좋았다”

  짝이 맞지 않아 놓인 젓가락이 내는 소리를 말발굽 소리로 묘사함도 재미있지만, 밥상 위에 새겨진 꽃 그림을 배경으로 잡음이 더욱 돋보입니다. 즉 꽃이 피어 있는 들판에 말을 타고 달리는 멋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분위기로 끌고 가니까요.

  양은으로 만든 두레밥상에 젓가락 들락날락하면 그 소리가 어쩌면 말발굽 소리로 들릴지도... 상상만 해도 왁자지껄한 정겨운 풍경이 떠오릅니다.


  “아! 저 꽃 핀 봄에 / 저 봄이 식구 수 대로 말발굽 소리를 내면”

  꽃 핀 봄날에 젓가락이 또독 또독 또독 또독 하고 말발굽 소리를 내면 꽃 그림 속을 다닐 수 있어 좋았다고 합니다. 온 식구가 한 밥상에 모여 다 함께 젓가락질할 때 나는 소리를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군요. 요란함보다 정겨움이 더 돋보이는.


  “잊히지 않는 아버지 / 저 봄날에 보고 싶어 좋았다”

  이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드러납니다. 이제 계시지 않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봄이 되면 더욱 솟아납니다. 저붐이 일으킨 조용한 울림, 저 봄에 더욱 생각나는 분. 그분이 저붐이 되어 또 '저 봄'이 되어 나에게 옵니다.


  *. 방언 사전에선 '저분(혹은 제분)'이 강원도 전라도 방언으로 나와 있지만, 전라도와 맞닿은 서부 경남에도 많이 썼지요. 다만 경상도에서 사용할 때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제사상에 오르는 젓가락을 특히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 뒤 경상도 전역으로 퍼졌고, 저분도 일반적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한 편 더 배달합니다.


    - 몹쓸 짓 -


  나는 오늘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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