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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an 30.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55)

제55편 : 고영민 시인의 '극치'

@. 오늘은 고영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극치
                        고영민

  개미가 흙을 물어와
  하루 종일 둑방을 쌓는 것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 보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노랗게 쌓여 있는 것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 떼가 몰려와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어스름 녘,
  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
  - [사슴공원에서](2012년)

  #. 고영민 시인(1968년생) : 충남 서산 출신으로 2002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한 언어로 정통 서정시 문법에 충실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으며, 현재 포항 ‘포스코교육재단’에 근무



  <함께 나누기>

  사흘 전 KBS 뉴스에 나온 내용입니다.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는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료와, 제작비 인상 문제를 언급하곤,
  "주연 배우는 이제 회당 10억 소리가 현실"이라거나, "배우들이 드라마 1회당 출연료를 4억 원에서 7억 원까지 불렀다"는 업계 관계자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 뉴스에 조연 배우와 보조출연자- 엑스트라 -의 출연료는 빠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대우를 받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위와 아래의 등급 차이가 아주 뚜렷합니다.  헌데 오늘 시에 나오는 개미, 금낭화, 소, 쥐, 솔잎, 잠자리, 산, 늙은 어머니, 우체부는 어느 누구도 주연, 조연, 보조 구분 없이 각 방면에서 극치를 이루며 사는 존재들입니다.
  시인이 뽑아낸 극치의 순간을 보이는 아홉 소재는 식물 동물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만 그 조합이 이질적이 아니라 조화를 잘 이룹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개미가 흙을 물어와 / 하루 종일 둑방을 쌓는 것"
  개미가 흙을 물어와 둑방을 쌓음은 자신의 집은 물론 가족을 지키려는 노력이니 극치일 수밖에요.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 보는 것"
  여기서 '서 보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금낭화 핀 마당'이 시행의 주인공입니다.  거기에 서면 어릴 때 함께 시간 자라던 형제자매가 떠오를 터. 그리움의 극치라 하겠지요.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 / 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시인 정지용은 그의 시 [향수]에서 자기 고향을 "얼룩백이 황소가 헤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라 하였지요. 소 울음소리는 바로 어릴 때 자라던 고향으로 인도합니다. 즉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극치입니다.

  "작은 다락방에 쥐가 끓는 것"
  이런 잡스런 추억(?) 갖지 않고 살았던 분들이야 이게 무슨 극치야 하겠지만, 자다가 얇은 베니어판이 삭아 구멍 난 그 사이로 쥐가 얼굴에 떨어진 경험 가진 분들에게 끔찍함의 극치라 할 수 있겠지요.

  "늙은 소나무 밑에 / 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 / 노랗게 쌓여 있는 것
  예전에 구들방 아궁이에 장작 땔 때 불쏘시개로 갈비(바짝 마른 노란 솔잎)만 한 게 없었지요. 등 따숩게 만들던 아랫목의 극치라 할까요.

  "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 떼가 몰려와 / 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가을날 파란 하늘에 점점이 박히던 빠알간 고추잠자리. 파랑과 빨강의 색채 대비가 주는 극치로 보았을지도.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
  논에 물이 가득했을 땐 농부들 마음도 그리 편했지요. 그 논물에 산 그림자가 들어와 앉는 모습은 안온한 분위기의 극치가 되겠지요.

  "늙은 어머니가 묵정밭에서 돌을 골라내는 것"
  예전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가 밭에 붙어살며 잡초 뽑기에 이어 돌 골라내기가 일상이던 시절. 손톱밑이 까맣게 잔돌 하나 없이 밭 일구던 노동의 극치를 생각했을까요.

  "어스름 녘, / 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 우체부가 밭둑을 질러 / 우리 집 쪽으로 / 걸어오는 것"
  소중한 사람의 반가운 소식 전하러 달려오는 우체부 아저씨. 기쁜 소식의 극치가 아닐까요.

  이렇게 오늘 시에는 식물과 동물과 사람이 서로 경계 없이 잘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소중함 면에선 다 같다고 하고선 실제로 가치의 경중(輕重)을 따져 나은 쪽에서 못한 쪽을 핍박하는 현실에서, 살아있는 생명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시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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