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Feb 14.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64)

제64화 : 문정희 시인의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 오늘은 문정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사랑하는 사마천 당신에게
                                           문정희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 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속의 눈
  천년의 역사에다 댕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 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한계령을 위한 연가](2013년)

  *.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은 한나라 무제 때의 역사가.

  흉노족을 정벌하려다 패해 흉노족에 투항한 장수 이릉을 변호했다는 죄로 사형이 언도되자, 당시 사형을 면하는 길은 두 가지, 금전 50만 전을 내거나 궁형(宮刑)을 받는 것이다. 궁형은 거세를 뜻한다.
  가난했던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인 대를 이어 역사서를 집필해 달라는 간곡한 유언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굴욕적인 궁형을 택한다. 그렇게 궁형을 당한 후에 감옥에서 사마천은 총 130권에 이르는 분량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집필해 낸다.

  #. 문정희 시인(1947년생) : 전남 보성 출신으로 여고 때부터 문재(文才)를 드러냈으며, 동국대 재학 중인 1969년 [월간문학]을 통해 등단. 여자들의 사소한 일상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데, 현재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으며 동국대 석좌교수.



  <함께 나누기>


  조선 시대에 내시가 되려면 남근이 없어야 가능했습니다. 남근이 없으면 남자가 아니니까 여자들이 득실득실한 궁궐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허니 남근은 남자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오늘 시는 오히려 남근이라는 물욕의 기둥을 잘랐기에 진짜 사내가 된 사내 사마천을 칭송하는 노래입니다.


  문정희 시인은 여성이 홀대받는 남자 중심의 세계에서, 불평등한 삶을 사는 여성을 위한 시를 쓴다는 평을 듣습니다. 배달 시에서도 고작(?) 남근 하나 지녔다고 우세를 떨치는 남자들에게 남근 없이도 멋지게 산 사마천을 들먹임은 분명 그런 의도를 녹였다고 봐야겠지요.


  오늘 시는 따로 덧붙일 해석이 필요 없습니다. 술술 읽히지요. 문정희 시인의 시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 세우기 위해 산다”

  기둥이 '남근'을 상징한다고 보면 쉽습니다. 아니면 '사내의 권위'라 해도 되고요. 하지만 ‘사내다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남 보기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허울 좋은 사내'일뿐. 오직 여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힘의 상징으로.

  그러기 위해 사내들은 정력에 좋다는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 먹고, 산삼을 찾아다닙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도 아니요, 부귀영화를 위함도 아닌 오직 남근이란 굵은 기둥을 세우기 위해.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남자에게 그렇게나 소중한 남근을 자르고서야 비로소 사내다운 사내로 우뚝 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마천.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습니다. 굳게 선 남근을 자르고 나서야 진짜 사내가 되었으니까요.


  “기둥으로 끌 수 없는 / 제 속의 눈 / 천년의 역사에다 댕겨놓은 방화범이 있다”

  이 시행을 우스개로 풀이합니다. 남자가 마음에 둔 여인에게 한마디 합니다. '당신은 방화범이요.' 뭔 말인가 싶어 여자가 멀뚱히 바라보자 남자가 덧붙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의 불을 붙였으니까요.'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 큼지막하게 찍어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는 사내들, 시간이 지나면 그 말들은 썰물이 빠져나가듯 공허함만 남기지만, 사마천의 말(혹은 글)은 그런 사내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영원히 살아남아 천년을 지탱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년 후의 여자 하나 /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이 시행은 시인이 제목 바로 아래 부제(副題)로 붙인 내용을 보면 짐작 갈 겁니다.

  - 투옥당한 패장(敗將)을 양심과 정의에 따라 변호하다가 남근(男根)을 잘리는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받고도 방대한 역사책 [사기]를 써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해 낸 사나이를 위한 노래 -


  시인은 「다시 남자를 위하여」란 시에서 “요새는 왜 사나이를 만나기가 힘들지” 하고 시작해서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로 끝맺습니다. 시인의 눈에는 진짜 사내다운 사내는 사마천으로 시작하여 사마천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좀 더 튼튼하고/ 좀 더 당당하게 / 시대의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을 세울 남자가 나타나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 아래 그림은 사마천의 초상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6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