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12.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79)

제79편 : 유하 시인의 '사랑의 지옥'


@ 오늘은 유하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사랑의 지옥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 [세상의 모든 저녁](1999년)

  #. 유하 시인(1963년생, 본명 ‘김영준’) : 서울 출신으로 1988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으나 영화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 짐.

  1992년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이후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쌍화점] 등을 감독. 2003년 이후 시를 쓰지 않고 있으며, 현재 동국대 대학원 영화영상제작학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모든 시인에게 적용되는 공식은 아니나 시만 쓰는 시인과 다른 일을 하면서 시를 쓰는 시인을 나눠 놓고 보면, 대체로 시만 쓰는 시인은 시의 깊이에 중점을 두는 반면, 여러 일을 하는 시인은 발상의 뛰어남에 힘을 줍니다.
  지금은 시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초창기 유하 시인의 시를 읽으며 느끼는 점은 정말 발상의 참신함이 돋보입니다. 시집 한 권을 펴놓고 읽어봐도 시 한 편 한 편의 경향이 다 달라 마치 여러 시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함도 다 그런 까닭일 겁니다.

  이 시를 읽으며 남자들은 어렸을 때 자기가 동물(주로 곤충)에게 한 못된(?) 장난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겁니다. 잠자리를 잡아 날개를 떼버린 채 날게 했다든지, 기어가는 지렁이에 대고 오줌을 쌌다든지, 물방개를 물 아닌 진흙탕 속에 넣는다든지...
  화자도 마찬가집니다.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 버”리는 몹쓸(?) 짓을 합니다. 꿀벌에게는 참 잔인한 행동이지요.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꿀의 주막, 나그네 가는 길에 주막이 있듯이 벌들이 찾아가는 꽃에도 '꿀의 주막'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술독에 빠지고 벌이 꿀통에 빠지는 순간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주막은 환멸의 지옥으로 바뀝니다.
  문득 예전에 읽은 글이 떠오릅니다. 어떤 이가 보물지도 얻어 동굴에 들어가 황금을 발견합니다. 헌데 기쁨도 잠시 갑자기 동굴 입구가 무너지고... 돌아서 나갈 길 없어 안으로 들어갔더니 온통 황금밭입니다. 그러나 나오지 못한다면 아무리 금이 가득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거기가 지옥일 수밖에요.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그래서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지옥 같은 호박꽃 속에 갇힌 꿀벌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그 지옥을 맴돌게 됩니다. 뛰쳐나오려 하나 쉽지 않습니다. 지옥의 담은 점점 더 높아지고, 그 담은 폐쇄와 고립으로 상처를 남기게 될 뿐.
  그럼 화자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바로 사랑의 덫에 빠져 오직 그대 한 사람만 그리워하고, 그대 한 사람 위해 속 끓이다 끝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닫혀 운다”
  사랑의 상처가 주는 고통에 참지 못해 잉잉거리며 아픔을 호소합니다. 허나 상처를 만든 이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자신입니다. '황홀한 캄캄한 감옥', 이 역설적인 표현은 또 어떤 뜻일까요. 감옥이니 캄캄함은 당연한데 왜 황홀하기도 할까요. 아무리 괴로워도 사랑하는 마음만을 놓지 않는다면 황홀할 수밖에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호박꽃 속에 벌을 가두는 게 사랑이라면, 그 벌을 풀어주는 것도 사랑일 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호박꽃에 스스로 갇히는 행위도 사랑이 아닐까 하는.
  이런 표현을 읽은 적 있습니다. ‘사랑은 늪이다. 특히 나쁜 사랑은.’ 그래서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답니다. 그래도 그런 사랑을 해 본 적 있다면 흐릿하게나 뜨뜻 미지근하게 산 사람보다 더 낫지 않을까요.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7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