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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20. 2024

목우시의 詩詩하게 살자(84)

@. 오늘은 이경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부엌

                                이경림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 매일 반복되는 한 가지 일만 빼고는 일은 대개 새벽녘에 터졌다 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는 조용히 공격해 왔다

  그녀는 소리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쪽으로 갔다. 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 얘야 세상에! 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 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 저긴 부엌이 아니에요 복도예요

  ─ 그래? 언제 부엌이 복도가 되었단 말이냐? 밥하던 여자들은 다 어딜 가구?

  ─ 밖으로 나갔어요. 엄마, 밥 따윈 이제 아무도 안 해요 보세요. 저기 줄줄이 걸어나가는 여자들을요

  ─ 깔깔깔(그녀는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배를 움켜 쥐고 웃었다)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있단다 저기 봐라 엄청나게 큰 밥솥을 걸고 여자들이 밥하는 것이 보이잖니? 된장 끓이는 냄새가 천지에 가득하구나

  ─ 엄마 제발 정신 차리세요 여긴 병원이란 말예요

  ─ 계집애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드는 게 아니란다. 아버지 화나시겠다 어여 밥하러 가자 아이구 얘야. 숨이 이렇게 차서 어떻게 밥을 하니?(모기만한 소리로) 누가 부엌으로 가는 길에 저렇게 긴 복도를 만들었을까? 세상에! 별일도 다 있지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오래 걸어 부엌으로 갈까?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청국장 냄새가 중환자실에 가득했다.

  - [상자들](2005년)


#. 이경림 시인(1947년생) : 경북 문경 출신으로 1989년 [문학과비평] 통해 등단. 의대 진학하여 의사의 꿈을 꾸다 적성에 대한 회의로 중퇴한 뒤 우여곡절 끝에 시를 쓰게 되었다고 함.

  (같은 이름의 시인이 한 명 더 있음)




  <함께 나누기>

  지금은 남자들도 부엌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예전에 밥 짓기는 여인에게 동지이자 적이기도 합니다. 남편일 도와 농사일 거들다가도 밥때가 되면 아낙은 잰걸음으로 부엌에 달려가 밥을 해야 합니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보채면 다른 일 놓아두고 부엌에 가 뭐든 먹을 거리 찾아 아이들 뱃속을 채워줘야 합니다. 부엌에 매인 삶, 아니 밥에 매여 사는 삶. 그게 우리 여인네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엌은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드는 곳이었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내용으로 보아 화자의 어머니는 치매를 앓아 요양병원에 계신가 봅니다. 딸은 짬짬이 들러 어머니를 돌보는 처지인 듯.

  "그때 그녀는 거기 머무르는 허공들처럼 아주 조용한 환자였다"
  문맥으로 보아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 끼치지 않는 흔히 말하는 '착한 치매' 환자인 듯.  다만 새벽마다 소리 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가는 행동을 빼곤.

  "-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인기척에 놀란 화자가 억지로 엄마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으면 엄마는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합니다. 화자는 여긴 병원이라 부엌이 없다 하자, 엄마는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합니다.

  울엄마도 그랬습니다. 치매로 가까운 시기의 기억은 없어졌건만 몇 년 전 일은 습관이 돼 기억했습니다. 이미 엄마에겐 부엌과 밥은 가족을 위한 몸에 박힌 인식칩이 되어 머리는 기억 못하나 몸은 기억하니까요.
  그 시절 엄마에게 밥은 해줘도 그만 안 해줘도 그만인 일이 아닙니다. 즉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안 하는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 사항이었습니다. 당연히 밥을 하는 공간인 부엌은 신성불가침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딸이 여긴 병원이고 엄마는 환자니까 가만 있어도 된다는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얘야. 정말 어리석구나 저 복도를 지나 저 회색 문을 열고 나가면 더 큰 부엌이 있단다"
  엄마에게 가장 큰 세상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부엌입니다. 엄마가 운전하는 솥뚜껑은 우주로 나아가는 탐사선과 같습니다.  밥 하기는 엄마의 책임과 의무라 엄마는 그 일에서 퇴직할 수 없는 영원한 직업입니다. 그걸 딸이 막으려 하니...

  오늘 부엌이란 신성한 제단에서 우리를 위해 밥 해준 어머니를 떠올리는 시간을 잠시 가져봅니다.

  *. 위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으며, 아래 사진은 일러스트레이터 문수현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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