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 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 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 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 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 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청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시 읽는 기쁨 1](2006년)
#. 이기철 시인(1943년생) : 경남 거창 출신으로 1972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영남대 교수로 계시다 퇴직했는데, 2021년 78세의 나이에 [흰 꽃 만지는 시간]이란 시집을 펴내는 열정을 보임
<함께 나누기>
이 시인을 아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허나 시 낭송가들이 좋아하는 시를 많이 쓴 시인입니다. 이 말은 읽을 맛을 주는(운율을 잘 느끼게 하는) 시를 많이 썼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쉬우면서 귀에 쏙 담기는. 오늘 시도 그렇습니다. 시가 길지만 읽다 보면 운율에 취해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벚꽃 개화 시기가 빨라져 올해 진해 군항제를 3월 22일부터 4월 1일까지 열기로 했다 합니다. 이 말은 벚꽃 만발할 시기가 일주일밖에 안 남았다는 말인데...
시로 들어갑니다.
꽃을 바라보며 나쁜 마음을 가지는 사람 있을까요? 꽃나무 아래서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지닐 수 있을까요. 밝게 웃는 꽃 앞에 서면 야수 같은 마음도 순해집니다. 왜냐면 꽃은 보는 이를 꽃빛깔로 물들여 순화시키니까.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 보렴" 우리는 각자 삶의 짐을 지게에 지고 자신의 길을 갑니다. 워낙 힘들어 곁눈 줄 짬이 없습니다. 헌데 화자는 옷도 신발도 벗어 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이란 짐도 벗어 놓고 맨몸으로 앉아보라 합니다. 잠시나마 그러고 싶습니다. 직업도 이름도 본적도 주소도 다 벗어 놓고 벚꽃이 활짝 웃는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싶습니다. 그러면 되는데, 정말 그러면 되는데 우린 왜 그러지 못할까요.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털처럼 가벼워질 텐데...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 놓고 /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그러면 됩니다. 잠깐만 시간 내 하루쯤 미루면 됩니다. 그깟 사랑도 미움도 벗어 놓고 마음을 비우면 됩니다. 돈 욕심, 명예 욕심, 권력 욕심 때문에 늘 초조감에 쫓기듯이 삽니다. 그게 뭐라고,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건만 거기에 매여 삽니다.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 우리 삶 /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꼭 벚나무 그늘이 아니어도 됩니다. 삶이 뿌옇게 보일 때면 산수유꽃 피는 나무 아래도, 목련꽃 피는 나무 아래도 괜찮습니다. 마침 봄 아닙니까? 눈만 주면 방긋 웃는 꽃들의 세계가 펼쳐지니까요. 발 살짝 내밀면 꽃잔치 열리는 곳이 한둘이래야 말이죠.
너무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우주의 수레바퀴는 다 굴러가고 우리네 인생 동태도 잘 굴러갑니다. 고작 열흘, 이 짧은 벚꽃 피는 시간엔 아주 잠깐 쉬어도 좋습니다. 쉬라고 마음을 세뇌시킵시다. 그 정도 쉰다고 우리네 삶이 흔들리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