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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25.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86)

제86편 : 류시화 시인의 '나는 투표했다'

@. 오늘은 류시화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나는 투표했다
                                 류시화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봄이 왔다고 재잘대는 시냇물에게 투표했다
  어둠 속에서 홀로 지저귀며
  노랫값 올리는 밤새에게 투표했다
  다른 꽃들이 흙 속에 잠들어 있을 때
  연약한 이마로 언 땅을 뚫고
  유일하게 품은 노란색 다 풀어 꽃 피우는
  얼음새꽃에게 투표했다

  나는 흰백일홍에게 투표했다
  백 일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는 것이
  백일을 사는 방법임을 아는 꽃에게 투표했다
  두 심장 중에서 부서진 적 있는 심장에게 투표했다
  부적처럼 희망을 고이 접어
  가슴께에 품는 야생 기러기에게 투표했다

  나는 잘린 가지에 돋는 새순의 연두색 용지에 투표했다
  선택된 정의 앞에서는 투명해져 버리는
  투표용지에 투표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나는 바다이다'라고 노래하는 물방울에게 투표했다

  나는 별들이 밤하늘에 쓰는 문장에 투표했다
  삶이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내가 삶에게 화가 난 것이라는 문장에,
  아픔의 시작은 다른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 아픔 끝내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문장에,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내 가슴이 색을 잃었을 때
  물감 빌려주는 엉겅퀴에게 나는 투표했다
  새벽을 훔쳐 멀리 달아났던 스무 살에게,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사랑에게 투표했다
  행복과 고통이 양쪽 면에 새겨져 있지만
  고통 쪽은 다 닳아 버린 동전에게 투표했다
  시의 행간에서 숨을 멈추는 사람에게 투표했다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2022년)

  #. 류시화 시인(본명 안재찬, 1958년생) :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새삼 소개가 필요 없는, 글 쓰는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책이 팔렸으며,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설문조사에서 윤동주 시인 다음으로 이름 올림




  <함께 나누기>

  지금 계절을 식물학자가 정의한다면 ‘이른 봄’이라 하겠지요. 둘러보면 이른 봄에 피는 꽃과 새싹들이 많이 보이니까요. 허나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봄이란 말이 쑥 들어가고 지금은 바야흐로 ‘선거철’이라 할 겁니다.
  텔레비전을 틀면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내가 사는 곳에 어떤 후보가 나오는지,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로 한참 들썩입니다. 처음 이 시 제목을 보았을 때 ‘어, 류시화가 투표란 글감으로 시를 썼네.’ 하여 고개를 갸우뚱하다 읽었습니다.
  요즘 쓰는 표현으로 하자면 제목에 낚인 셈이지요. 허나 기분 나쁜 낚임이 아닙니다. 잘 낚였다는 기분이 들었기에. ‘역시 류시화!’란 찬사 터뜨렸습니다. 마침 시집 나온 연도를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아 아직 따끈따끈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오늘 시는 길지만 쉽게 쓰여 특별한 해설 없이도 술술 잘 읽힐 겁니다. 따라서 일일이 해설 달지 않습니다. 다만 몇 군데 눈에 띄는 지점을 임의로 골랐습니다. ‘참, 시 잘 쓰는 시인’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구절을.

  “나는 첫 민들레에게 투표했다”
  류시화 시인은 민들레를 글감으로 한 시를 여러 편 썼습니다. 아니 이 시인뿐일까요. 민들레를 붙잡지 않은 시인이 아마 더 적을 겁니다. 민들레는 봄날을 노랗게 물들이고, 발에 밟혀도 곧장 일어나고, 홀씨가 아름답게 흩날리는 모습들로 하여 생각거리를 많이 주기 때문이지요.

  “두 심장 중에서 부서진 적 있는 심장에게 투표했다”
  아픔을 겪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전혀 아픔을 겪어본 적 없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한다면 앞의 사람을 택하겠다는 말이겠지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라야 삶의 참뜻을 안다’란 서양 속담처럼 시련과 역경을 겪은 사람이 더 낫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와 '네가 틀릴 수도 있다' 중에서 / '내가 틀릴 수도 있다'에 투표했다”
  지금도 미사 중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옵니다!” 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둘 사이에 다툼이 있다면 내가 옳다기보다 내가 그르다고 말하긴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화자는 그렇게 하자고 합니다.

  “오늘은 나의 몫, 내일은 신의 몫이라는 문장에 투표했다”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있습니다. 큰일을 앞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盡人事) 하늘에 결과를 맡기고 기다린다(待天命)는 뜻입니다. 오늘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내일의 하늘에 맡긴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몸은 돌아왔으나 마음은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 사랑에게 투표했다”
  그와 헤어져 집에 왔습니다. 그러니 몸은 떨어졌습니다. 허나 마음만은 아직 그와 사랑을 속삭이던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또는 이별한 뒤에 그동안 맺은 정을 매정하게 끊어버리는 사람보다 정을 안고 사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뜻으로도 풀이해 봅니다.


  보름 뒤 4월 10일, 우린 누군가에게 투표해야 합니다. 이미 마음속으로 다 정해놓았겠지요. 다만 아직 누구에게 투표할까 정하지 않고 고민하신다면, 아래와 같은 사람을 선택하시면 어떨까요.

  아무리 바빠도 길바닥에 고개 내민 노오란 민들레꽃에 눈길 주고, 시냇물 재잘대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얼음새꽃이란 말이 나오면 사전을 뒤적여 어떤 꽃인지 알아보고, 백일홍이 피고 짐에 관심 가지는 후보자에게 투표하시기를...
  이런 자잘한 것에 관심 기울이는 후보라면 큰 것도 절대 등한히 하지 않을 겁니다. 거꾸로 큰 것에만 몰두하는 후보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을 무시합니다.

  아! 한 달에 시집 한 권 사 읽는 후보라면 무조건 찍어주련만...

  *. 위 사진 노란꽃은 '얼음새꽃'인데 다들 '복수초'라 알고 계실 겁니다. 복수라는 어감이 좋지 않아 이름 바꿔 쓰기 운동으로 만든 꽃이름입니다. 아래는 흰백일홍입니다만 사실 흰백일홍을 백일홍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백일홍' 할 때 '홍'은 붉을 '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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