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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27.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88)

제88편 : 이영도 시인의 '아지랑이'

@. 오늘은 이영도 시조 시인의 시조를 배달합니다.


     아지랑이
                     이영도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 [아지랑이](2016년)

  *. 다사하다 : 조금 따뜻하다.
  *. 장다리 : 무와 배추 따위의 꽃줄기를 가리킴

  #. 이영도 시인(1916년 ~ 1976년) : 호는 ‘정운(丁芸)' 또는 '정향(丁香)’ 황진이 이후 최고의 시조 시인이란 평을 받는 분.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정신적 사랑으로 수많은 연시를 낳게 만든 시인으로 많이 알려짐.

  위 시는 원래 오빠인 이호우 시조 시인과 함께 편찬한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1968년)란 시조집에 실렸는데, 2016년에 [아지랑이]란 제목으로 다시 나옴




  <함께 나누기>

  오늘 시조는 고시조에서 보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된 장별 배행시조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시조입니다. 지금은 이런 형태의 시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만 이렇게 시조의 율격을 자유롭게 변화시킨 장본인이 바로 이영도 시인입니다.
  유부남이던 청마 유치환 시인과 청상과부이던 시인 사이의 플라토닉 러브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시인은 그저 그런 시인일 수 있습니다. 허나 괜히 ‘황진이의 재림’이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만큼 뛰어난 시조 시인이란 의미를 담았으니까요.

  시조로 들어갑니다.

  겨우내 추위에 시달리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면 땅이 먼저 반응합니다. 햇살을 마중하듯 어렴풋이 솟아나는 어른거림. 아지랑이는 아시다시피 봄철 햇빛이 강하게 내리쬘 때 공기가 지면(地面) 근처에서 불꽃같이 아른거리며 위쪽으로 흐르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아지랑이 아른아른 피어오를 때면 들과 산에 봄꽃들이 함박웃음 터뜨리며 우리들의 눈길 붙잡습니다. 꽃이 피면 날아드는 게 벌과 나비지요. 그럴 때 아지랑이인지 나비인지 아른아른거리는 기운들.

  이 시조는 짧지만 많은 얘기를 담았습니다. 감상의 요령은 처음 한 번 읽고 눈을 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뜬 다음 다시 한번 읽고 눈을 감습니다. 시조 내용이 그림이 되어 나타날 때까지.
  이 시조에 몇 개의 소재가 나옵니다. ‘당신, 사랑, 아지랑이, 장다리, 텃밭, 나비’ 이 가운데 핵심 소재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다른 소재는 사랑을 끌어오기 위한 부재료입니다.

  내 사랑은 아지랑이가 되어 당신 가슴에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내 사랑은 나비가 되어 당신 찾아 훨훨 날아다니고... 봄날이 무르익으면 땅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그대 향한 그리움도 옹글지게 피어오릅니다.
  봄날이 깊어질수록 그대 향한 그리움에 나비가 되어 찾아갑니다. 그대가 어디로 가든 나는 그대를 찾아갑니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사랑, 아픈 봄처럼 마음이 아파도 그 사랑 찾아다니는 애틋한 마음 담아봅니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나비 날개에 내 마음을 얹으면 그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겠지요. 종장 끝에 쓰인 '나비'의 시행 배열은 '사랑'이란 마음의 움직임을 그림으로 그려내듯 영상으로 찍어낸, 곧 나비가 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혹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 따지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지요. 이 시를 읽는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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