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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02.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91)

제91편 : 김경주 시인의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오늘은 김경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네.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어머니
  볼에 문질러보네. 안감이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순간이었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네.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네.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송이 몇 점 다가와 물드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꽃물이 똑똑
  떨어지네.
  눈덩이만 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일생을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냄새 속으로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나니.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년)

  *. 그 드물고 정하다는 : 백석 시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에서 빌려옴

  #. 김경주 시인(1976년생) :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한때 예고 문창과, 대학 문창과에서 그의 시가 텍스트로 언급되는 등 매우 주목받는 시인으로 각광 받다 10년 가까이 시를 쓰지 않고 있음




  <함께 나누기>

  문득 생각해 보니 울엄마를 ‘어머니’ 말고 ‘여자’라고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울엄마는 왜 제게 여자가 아닌 어머니로만 기억되고 있을까요? 분명 당신도 어머니 아닌 여자로 꾸미고 싶었을 텐데.
  단 한 번도 그럴 듯한 옷을 입은 걸 본 적 없습니다. 늘 동네 아줌마들이 입는 펑퍼짐한 치마에 눈에 띄지 않는 빛깔의 저고리 걸쳤을 뿐. 가끔 울엄마 위해 생일이면 맛있는 것을 사다 주긴 했지만 예쁘고 고운 옷을 선물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제가 김경주 시인의 시를 찾아 읽다 책을 덮었습니다. 워낙 어려워서 읽다 무슨 뜻인지 몰라 포기했다는 의미입니다. 철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도무지 이해 못할 표현과 수사. ‘아, 이 시인의 시는 좋은데 나랑 인연이 맞지 않네.’ 하다가 이 시를 만났습니다.

  이 시는 따로 해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쉽게 읽힐 겁니다.
  사내애들은 자기 엄마가 여자인 걸 종종 잊고 삽니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로만 알아선지 엄마 말고 여자란 숨은 의미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늘상 보는 모습이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설거지 하는 등 부엌데기 모습만 보아선지 젊을 때부터 엄마는 엄마일 뿐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가끔 모임이나 예식장 갈 때 꾸미면 ‘어, 우리 엄마도 이쁘네!’ 하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 푸석한 머리와 화장기 없는 모습을 대하면 ‘역시 엄마네!’ 합니다.

  “고향에 내려와 /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네. /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 사실을”
  화자는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다 어머니의 팬티를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세상에 꽃무늬 팬티라뇨. 그때까지 자기 엄마가 여자인 사실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허나 엄마는 아니지요, 늘 여자임을 간직한 채 살고 있었건만.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무늬였음을 / 오늘은 그 적멸이 내 볼에 어리네”
  어머니는 단순히 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고유 이름 지닌 여자였습니다. 아들은 잊고 살았는지 몰라도 어머니는 여자임을 잊지 않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니 화자는 부끄러움에 자기 볼에도 꽃무늬 같은 붉은 기운이 어립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 팬티들은 싱싱했네 /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 않았네”
  어머니의 팬티에 그려진 꽃무늬는 살아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가 여자임을 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새깁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펑퍼짐한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로 가족을 대해도 어머니는 결코 여자임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 푸르스름한 살냄새 속으로 / 그 드물고 정하다는 햇볕이 포근히 / 엉겨 붙나니”
  빨랫줄에 걸린 어머니의 꽃무늬 팬티. 비록 오래돼 낡았지만 어머니가 여자임을 증명하며 햇살 속에 나부낍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그 어머니가 미소 띄며 아들을 향해 수줍게 웃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때 월급날 엄마 위해 예쁜 옷 하나 사드리지 않았는지 왜 동동구리모 하나 사드리지 못했는지... 참 무심한 아들, 이제사 뉘우칩니다. 울엄마도 여자였음을. 그래서 여인이 누리는 고움을 유지하고 싶어함을 왜 몰랐을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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