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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04.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93)

제93편 : 정희성 시인의 '저 산이 날더러'


@. 오늘은 정희성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저 산이 날더러
   - 木月詩韻을 빌어 -
                                      정희성

  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
  날더러는 삽이나 들라 하고
  쑥굴헝에 박혀 쑥이 되라 한다
  늘퍼진 날 산은
  쑥국새 울고
  저만치 홀로 서서 날더러는 쑥국새마냥 울라 하고
  흙 파먹다 죽은 아비
  굶주림에 지쳐
  쑥굴헝에 나자빠진
  에미처럼 울라 한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년 초간, 1999년 복간)

  *. 목월시운(木月詩韻) :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란 시의 운율인데, 그 시에 답한다는 뜻을 담음
  *. 쑥굴헝 : 굴헝은 '구렁'의 사투리로 움푹 파인 땅 또는 빠지면 헤쳐 나오기 어려운 환경을 비유한 말.

  #. 정희성 시인(1945년생) : 경남 창원 출신으로 1970년 [동아일보]를 통해 등단. 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다가 퇴직했으며, 제16대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억압받는 농민과 소시민의 처지를 잘 표현한 시와 선 굵은 시를 쓴다는 평을 들음


(목가적인 시골 모습)



  <함께 나누기>

  오늘 시를 이해하려면 먼저 부제에서 ‘목월 시운을 빌어’에서 밝힌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를 읽어봐야 합니다.

    - 산이 날 에워싸고 -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 [청록집](1946년)

  두 편의 시를 읽으면 그 차이점이 눈에 확 드러나리라 여깁니다. 박목월의 시는 자연에서 소박한 삶을 살고 싶다는 메시지를 담은 다분히 자연친화적인 작품인데 비해, 정희성의 시는 앞 시완 전혀 다름이 느껴질 겁니다.
  오늘 시에서 산은 평화와 넉넉함과 거리가 멀고 팍팍한 현실의 힘겨운 삶을 우리에게 명령하며 강요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박목월의 시가 더 다가올 겁니다. 특히 '강 건너 밀밭길을 구름에~~'로 시작하는 「나그네」란 시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어느 시가 좋다는 걸 말하려는 의도 아닙니다만 이상주의자라기보다 현실주의자에 가까운 저는 정희성 시인의 시가 더 다가옵니다. 허나 시 속에 나오는 '산이 날더러는 흙이나 파먹으라 한다'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은 늘 간직하니까요.
  농사지어 봐야 농협에 얻은 빚 갚고 이자 내고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남는 게 없어 멍하니 산을 쳐다보고 있는데, 산이 흙이나 파먹고 살라고 합니다. 그저께 마을 한 바퀴길에 청년회원 한 분을 만났습니다. 회원 가운데 유일한 전업농부입니다. 그분과 잠시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나 : 요즘 농사지어 먹고살 만합니까?
  회원 : 몸은 해가 갈수록 힘에 부치고 수익은 해가 갈수록 더 줄어들고...

  더 얘기 나눴습니다만 생략합니다. 농촌 현실은 이 시 나온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 상황을 담은 시가 오늘 배달하는 작품입니다. 봄날, 산과 들에 지천으로 널린 게 쑥이지만 보릿고개 넘기려면 다들 쑥 캐러 달려들 테니 그것도 빨리 가서 캐야지 안 그러면 화자의 아비나 어미처럼 나자빠진답니다.
  그럴 때 마지막 부분에서 묵직한 울림이 전합니다.
  "산이 날더러 /흙이나 파먹다 죽으라 한다"


(목가적인 모습과 달리 현실은 뙤약볕 아래 팥죽땀 흘리며 콩밭 매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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