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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0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95)

제95편 : 이문재 시인의 '녹이 슬었다'

@. 오늘은 이문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녹이 슬었다
                             이문재

  고장이 난 것이다
  안쪽에 녹이 잔뜩 슬었다
  연결 부위가 다 뻑뻑해졌다
  눈도 어두침침하고
  호흡도 많이 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너는 탈이 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기억력이 상상력으로 승화되지 않으며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자존감
  자신감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너는 탈진한 것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념의 껍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무기력이 분노를 부둥켜안지 않아서
  기억이 미래를 움켜쥐지 않아서 탈이 난 것이다
  꿈이 따뜻한 이야기를 빚어내지 못해서
  우리가 좋은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녹슬어버린 것이다
  너 민주주의 말이다

  아니다
  고장 나 녹이 슨 것은
  자신 있게 속물이 된 우리들이다
  탈이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우리 시민들
  경제적으로 성난 동물이 된 우리 소비자들
  세련되게 나약해진 우리 혈기 왕성한 괴물들이다
  - [서정시학](2014년 봄호)

  #. 이문재 시인(1959년생) :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으며, 제1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시사저널] 기자와 [문학동네]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시골에 살면 웬만한 공구는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동드라이브부터 엔진톱, 전동대패, 함마드릴 같은 전동공구는 물론, 삽, 곡괭이, 노루발못뽑이(일본어로 ‘빠루’), 톱, 낫, 도끼, 망치, 펜치 같은 수동공구도 다룰 줄 알면 생활이 아주 편리합니다.

  그런데 이들 공구는 제때 기름을 쳐주지 않으면 금방 녹이 슬게 되고 자칫하면 못 쓰게 됩니다. 처음 「녹이 슬었다」란 제목을 봤을 때 언뜻 공구나 기계제품을 두고 하는 말인 줄 알고 덤벼들었는데...

  시로 들어갑니다.

  “고장이 난 것이다 / 안쪽에 녹이 잔뜩 슬었다 / 연결 부위가 다 뻑뻑해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 짐작대로 공구가 녹이 슬었다는 내용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다음에 이어지는, ‘눈도 어두침침하고, 호흡도 많이 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에 이르면 공구가 아니라 사람이 녹슬다는 뜻로 이해하게 됩니다.

  “너는 탈이 난 것이다 /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그렇지요,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탈이 나도 크게 난 셈이지요. 그러니 기억력이 점점 사라지고 자존감과 자신감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결국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끝났으면 '아 화자가 생명의지를 잃고 완전히 피폐한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여겼을 텐데...

  갑자기 “돈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 이념의 껍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에 와선 뭔가 의아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타를 얻어맞습니다. “녹슬어 버린 것이다 / 너 민주주의 말이다” 여태까지 어느 한 개인이 녹슨 줄 알았건만 갑자기 민주주의가 녹슬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르러 뜨끔합니다. 민주주의를 녹슬게 만드는데 저도 한몫하지 않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으니까요. 결국 시인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녹이 나’ 고장났다고 진단합니다. 다른 의미에서가 아니라 너무 속물이 되었다고.

  “탈이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우리 시민들 / 경제적으로 성난 동물이 된 우리 소비자들"
  민주주의 가운데서도 경제 부문의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아 총체적 난국입니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고 앞이 캄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탈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아픔을 느낀다면 그래도 아직 희망이 있는 것 아닐까요? 내가 고장이 났구나, 내게 병이 생겼구나, 내가 속물이 되었구나 하고 인정한다면 아직 새로 고칠 여지가 남았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만 욕하다 보면 정작 나의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속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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