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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Apr 08.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94)

제94편 : 이희섭 시인의 '구로역에서'

@. 오늘은 이희섭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구로역에서
                                이희섭

  평행선을 그으며 달려오는 열차가 발끝에서 멈추었다
  전철이 토해낸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막 타려고 하는 찰나 방금 흘린 듯한
  만 원권 지폐 세 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른하던 휴일 오후의 눈들이 반짝였고
  최초의 발견자인 내가 몸을 수그리는 순간
  뒤에서 나타난 지팡이가 어느새 돈을 누르고 있었다
  그 지팡이는 장악한 돈을 두세 번 더 짚었다
  '장악'이라는 말에 갈채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쟁탈전
  머쓱해진 나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경로석으로 향하는 노인의 결연한 뒷모습이 보였다
  구로에서의 빛나는 속도
  지혜로운 노인 9명이 장수했다고 붙여진 이름 九老,
  그곳에서의 절박한 속도가 열차를 달리게 하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 가장 빠르고 긴 손을 보았다
  - [초록방정식](2017년)

  #. 이희섭 시인(1960년생) : 경기도 김포 출신으로 2006년 [심상]을 통해 등단한 뒤 국세청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퇴직. 또한 아내 정용화는 [대전일보] 신춘문예로, 딸 이혜미는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가족 모두가 시인인 시인 가족.




  <함께 나누기>


  작년 마을 한 바퀴 도는 길에 보았던 일입니다. 산길로 접어드는데 길가에 도라지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그걸 보고 제가,
  “야 저 도라지 분명 산도라지일 텐데 켜가야겠다.” 하자,
  “그냥 놔두세요, 오가며 보면 얼마나 좋아요.”
  허나 오랜 경험으로 길가 도라지는 보는 이들이 절대 그냥 두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아내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려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길을 유심히 봤건만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켜 내간 흔적도 남았고...

  시로 들어갑니다.

  화자는 구로역에서 전철을 타려 하다 방금 누군가 흘린 듯한 만 원권 지폐 석 장 놓인 걸 발견합니다. 순간 휴일의 나른함에 졸던 주변 사람 눈들이 반짝였고, 최초 발견자인 화자가 몸을 수그리고 집으려 하는 순간 지팡이 하나가 돈을 눌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지팡이의 주인은 그 돈을 장악하려는 듯 돈을 두세 번 더 짚었습니다. 마치 젊은이들이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할 때 침 뱉어놓듯이. 경쟁에서 패배한 화자가 머쓱해져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는데 경로석으로 향하는 노인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구로(九老)란 지명은 지혜로운 노인 아홉 명이 장수했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인가요, 그렇게 지혜롭게 3만 원을 가로챘을까요? 화자의 눈에 들어온 노인의 손은 나이와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긴 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접근을 완벽히 막은.

  저는 이 시에서 다음 이 시행에 주목합니다.
  “그곳에서의 절박한 속도가 열차를 달리게 하지 않았을까”
  절박한 속도가 열차를 달리게 함이라기보다 삶의 절박함에 처한 노인이 보여준 결연한 동작으로. 그래서 노인은 열차처럼 평생을 흔들리며 살아왔기에 자신 앞에 놓인 이득을 놓치지 않으려 함이었는지...

  이 작품은 시로 써도 좋지만 줄거리 이용한 한 편의 콩트로 만들어도 읽는 이를 끌어당길 멋진 작품이 나오리라 여깁니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구로역, 만 원권 지폐 석 장, 지팡이 든 노인. 흘린 돈에 집중하는 사람들의 눈...

  문득 카메라를 들고 촬영해 보고 싶습니다.

  *. 아래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원은희 작가의 작품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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