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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02.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09)

@. 오늘은 이정록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그믐달
  -어머니 학교 10-
                               이정록

  가로등 밑 들깨는
  올해도 쭉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거지.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지나고 봐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 [어머니 학교](2012년)

  #. 이정록(1964년생) : 충남 홍성 출신으로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천안중앙고 한문교사로 근무하다가 재작년 2월에 명퇴했으며, 홍성에 있는 ‘만해문예학교’ 교장 일을 봄




  <함께 나누기>

  우리나라 시인 가운데 재미있는 시를 쓴 시인 첫째로 오탁번 시인을 꼽는다면 두 번째로 이정록 시인을 들먹입니다. 「참 빨랐지 그 양반」이란 시를 읽어보면 얼마나 재미있는 시를 쓰는지 알 수 있는데 시집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십여 년 전 시인이 [어머니 학교]란 시집을 펴냈는데, 평소 어머니 하시는 말씀을 받아 정리해놓은 걸 모아 시집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 시집을 어머니와 공동작업으로 펴낸 책이라 당당히 밝혔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의 해학적 기질이 유전으로 이어진 듯.

  어느 가정에서든 어머니는 사랑의 화신이요, 가장 훌륭한 스승입니다. 울엄마도 그랬습니다. 제가 처음 성당 나간다고 했을 때 독실한 불교신자인 어머니께서,
  "그래, 성당에선 제사 지내도 된다 카대."
  다음해 집에 갔을 때 어머니는 뒷산 절에 초파일날 제 이름으로 시주하고 5만원 연등도 달았다고 하셨습니다.  그에 제가,
  "아 이젠 제가 성당 다니니 연등 달지 않아도 됩니다." 했더니,
  "야 이놈아, 하느님도 도와주고 부처님도 도와주면 얼마나 좋아!"

  그 가르침에 지금도 제가 믿고 있는 종교가 최고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부처님을 따르든 예수님을 따르든 (심지어 종교가 없어도) 착하게 살면 된다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가로등 밑 들깨는 / 올해도 쭉정이란다 / 쉴 틈이 없었던 거지"
  제가 처음 산골 달내마을로 옮겼을 때 우리 집 바로 앞에 가로등이 있어 참 좋았습니다. 일부러 조명등을 돈 들여 달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허나 며칠 안 돼 불이 꺼지길래 등이 나간 줄 알고 한전에 전화했더니 와서 보곤 등이 이상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 불 켜지는 걸 확인까지 했는데 다음날 또 불이 켜지지 않기에 알아봤더니 이웃 어르신이 스위치를 아예 내려놓은 겁니다. 어르신에게 따지듯이 말했더니 밤에 불이 켜져 있으면 밭작물이나 벼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말씀. 작물도 잠잘 시간이 필요하단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그믐달은 ‘그믈다’의 어간 ‘그믈’에 ‘달’이 붙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그믈다는? 바로 평안도 사투리로 ‘사그라들다’란 뜻을 지녔습니다. 그믐달은 새벽녘 해가 뜨기 직전에 잠깐 보였다가 해가 뜨면 사그라드는 달입니다. 그래서 '애잔함의 달'이라 하지요.
  또 우리 속담에 ‘달도 차면 기운다’란 표현이 있는데 ‘가득찬 달’이 보름달, ‘기운 달’이 그믐달을 가리킵니다. 어떤 좋은 일이든 늘 계속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위기가 온다는 뜻이며, 한편 그믐달이 지나면 초승달이 떠오르니 다시 행운이 찾아오고요.

  그러니까 우리네 삶은 늘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한쪽으로만 계속되진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화자의 어머니는 한 마디 더 덧붙입니다.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 지나고 봐라. 사람도 /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언젠가 재벌2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본 적 있습니다. 5성급 호텔에서 최고 요리사가 만든 최고급 요리만 먹던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가난한 여인을 만나 사귑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 집에 따라가자  음식을 내놓습니다. 그가 보니 주방도 더럽고 빛깔도 퇴색하여 입에 넣고 싶지 않았지만 예의상 한 입 대보니 기가 막힌 맛이었습니다.
  그가 그녀의 집을 찾아가 세 번째로 음식을 먹던 날, 이리 말합니다.
  "나는 부자만의 식사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음식맛에는 고급 재료보다 더 귀한 정성이 담겨야 하는구나."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 어떤 세상이 맨날 / 보름달만 있겄냐? / 몸만 성하면 쓴다"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운 달도 다시 차오릅니다. 떵떵거리며 살던 사람도 몰락할 수 있고, 노숙자도 빛을 볼 때 있습니다. '병든 재벌보다 건강한 거지가 낫다.' 우리네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재물보다 건강입니다.

  "몸만 성하면 된다"
  시인 어머니의 참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 장용길 화백의 「그리운 기억」 그림에 나오는 '그믐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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