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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07.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11)

제111편 : 박후기 시인의 '아르바이트 소녀'

@. 오늘은 박후기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아르바이트 소녀
                                  박후기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면 좋겠지만
  굳이 앞날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바꿀 수 없는 앞날인 걸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광장의 *팬지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지요
  화장만 고치고 나오지요

  애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우린 컵라면 같은 연애를 하지요
  가슴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삼 분이면 끝나거든요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
  - [격렬비열도](2015년)

  *. 팬지 : 팬지꽃

  #. 박후기 시인(본명 ‘박홍희’, 1968년생) : 경기도 평택 출신으로 2003년 [작가세계]로 등단. 음악다방 DJ도 하고, 그룹사운드의 멤버로 활동도 하고, 공연 기획도 여러 번 한 다재다능한 능력의 소유자.



  <함께 나누기>


  이틀이 멀다 하고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뉴스가 뜹니다. 아주 드물게 훈훈한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 힘들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월급을 떼먹는 사업주에서부터,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욕설과, 심지어 폭행에 이어 성희롱도 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뜹니다.

  아르바이트생 가운데는 드물게 용돈벌이나 사회 경험을 쌓기 위한 경우도 있지만 생계나 학비 때문에 나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사회적 약자를 노리는 고약한 사업주들에 대한 뉴스가 뜰 때마다 마치 우리 자식이 당하는 것 같아 손이 부들부들 떨립니다.


  오늘 시는 열아홉 살 나이로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하며 살아야 하는 소녀가 주인공입니다. 그녀가 일하는 장소는 ‘24시 편의점’ 그녀의 소원은 하루가 25시간입니다. 한 시간 늘어난 만큼 소득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 바꿀 수 없는 앞날인 걸요”

  24시간을 25시간으로 바꿀 수 없다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착잡해집니다. '바꿀 수 없는 앞날'에. 한 번 흙수저는 영원한 흙수저, 한 번 계약직은 영원한 계약직, 한 번 아르바이트생은 영원한 아르바이트생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 옷만 갈아입고 나오지요 / 화장만 고치고 나오지요”

  아무도 없는 집, 다른 가족들 모두 돈 벌러 가 식구조차 얼굴 마주칠 시간 없다는 뜻으로 보면 참 아픕니다. 잠시 휴식 취할 겨를도 없이 옷만 갈아입고 나와야 합니다. 열아홉 살이면 친구 만나는 등 개인 시간도 나야 할 텐데 그럴 짬이 없습니다.


  “애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 우린 컵라면 같은 연애를 하지요”

  ‘컵라면 같은 사랑’, 참 먹먹합니다. 만나서 좋은 데 가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은데, 주어진 시간은 고작 컵라면 끓을 정도. 그만큼 짧은 만남으로 끝나는 사랑입니다. 둘의 가슴은 뜨거우나 진득하니 영화 한 편 볼 시간조차 없습니다.


  “가끔은 내가 /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아무런 희망도 앞날에 대한 기대도 보이지 않고 그저 시급대로 받아 사는 아르바이트에 목매단 인생. 엄마 아빠도 돈 되는 정규직보다 고작 시급 받는 일을 합니다. 소녀도 부모가 되면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게 될지...


  “아, 아르바이트는 /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

  죽을 때까지만 아르바이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아르바이트 놓지 못한다는 뜻으로 본다면 참... 아, 이 소녀의 외침! 누구든 이 시를 읽고 난 뒤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게 될 듯.



  *. 위 사진은 [뉴스투데이](2017년 3월 8일)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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