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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y 08.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12)

제112편 : 최승자 시인의 'y를 위하여'

@. 오늘은 최승자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y를 위하여
                          최승자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 때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 찬 공기도 보였어

  하난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으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 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즐거운 일기](1984년)

  #. 최승자 시인(1952년생) : 충남 연기 출신으로 1979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

  이 시인 소개를 덧붙입니다.
  기초생활 수급대상자로 뉴스에 올라 시인의 가난을 얘기할 때 꼭 거론되는 이름 ‘최승자’,
  여성시인이란 말에서 ‘여성’이란 접두사를 떼게 만들도록 굵직하고 거칠게 시를 쓰는 ‘최승자’,
  조현병 같은 정신 질환을 앓고,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고도 세 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계속 시를 쓰겠다는 ‘최승자’,
  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온 여학생들에게 교수들이 가장 먼저 읽으라고 권한다는 ‘최승자’ 시집,
  시집 한 권 다 뒤져도 달달한 시 한 편 없어 정말 시 좋아하는 사람들만 찾는다는 ‘최승자’,
  시집 한 번 읽고는 그녀를 좋아하진 않아도 그 이름만은 기억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최승자’




  <함께 나누기>

  어떤 평론가는 “이렇게 처절한 사랑의 시를 읽어본 적 없다.”라고 했는데, 저는 “이렇게 잔혹한 사랑의 시를 읽어본 적 없다.”라고 하겠습니다. '역시 최승자!'란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게 만듭니다. 치열하면서도 처절하고, 처절하면서도 가슴 찢는 사랑.
  이 시에서 소문자 'y'는 누굴까요? 가장 우선 드는 생각은 화자가 미치게 사랑했다 배신당한 남자의 이니셜로 보입니다. 다음으로 ‘y’는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 직전의 태아 모습을 닮았습니다.
  전자를 따르면 한때 사랑했던 사내를 향한 저주의 시요, 후자로 본다면 태어나지 못하고 죽음 당한 자기의 아이를 향한 시가 됩니다.

  1연으로 갑니다.
  "너는 날 버렸지 / 이젠 헤어지자고 / 너는 날 버렸지 / 산속에서 바닷가에서 / 나는 날 버렸지"
  ‘너’에게 버림받고 급기야 ‘나’에게도 버림받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럼 왜 그에게 버림받게 되었을까요?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y가 화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그냥 즐기려 만났는지 알 수 없으나 화자가 임신하는 순간 끝났습니다.

  2연으로 갑니다.
  y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화자는 낙태수술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미혼모가 살아가기 힘든데 당시엔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로 날고픈' 심정이야 다분했겠지만 그런 자유가 허락될 수 없는 당시로선 답답하고 억압적인 상황에 매일 수밖에.

  3연으로 갑니다.
  "하난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마취주사 한 방에 화자에게 주어진 이성의 시간은 이내 끝났습니다. 그 순간을 화자는 죽음과 같다고 여겼을 지도. 왜냐하면 내 아이가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갔으니까요. 이젠 아이는 사람이 아니라 오물이 된 겁니다.
  
  "나쁜 놈, 난 널 죽여 버리고 말 거야"
  여기서 '나'는 누구일까요? 화자로 보면 쉽지만, 달리 태아로 감정이입된 화자로 봄이 더 나을 듯. 즉 죽음 당한 당사자(태아)가 자기 아비를 향해 비수 꽂는 심정을 담았다고. 그게 더 무섭지요, 여자가 남자를 향한 저주보다.

  4연으로 갑니다.
  "널 내 속으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이 시행을 두고 '한국 현대시에 손꼽히는 절창이다'라고 한 평론가가 있습니다. 나를 버린 나쁜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자인 나는 선포합니다. '내 자궁 속에서 다시 너를 낳겠다'라고 그리하여 다시 태어나 고통스럽게 살다 죽었으면 하는 저주를 내립니다. 아 소름 끼치도록 무섭습니다.

  "오 개새끼 / 못 잊어"
  그렇게 저주했으니 당연히 개새끼란 욕이 절로 나오겠지요. 헌데 가만 보십시오, 뒤에 나온 '못 잊어'를.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죽이고 싶도록 밉지만 y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놈의 정 때문인지...
  "오 내 사랑, 그 나쁜 개새끼!"



  *. 오늘 시를 분석한 평론가가 꽤 됩니다. 따라서 시 해설에 그분들의 도움 받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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