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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04.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27)

@. 오늘은 유홍준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주석 없이
                              유홍준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새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 버리는 나를 이해해다오

  가시와 가시 사이
  탱자꽃 필 때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 [나는, 웃는다](2006년)

  *. 주석(註釋) :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함

  #. 유홍준 시인(1962년생) : 경남 산청 출신으로 1998년 [시와 반시]를 통해 등단. 고졸이 최종학력으로 진주공단에서 일할 때 ‘공단문학상’에 시를 출품한 인연으로 시인이 되었으며, 고졸 출신으로 그리고 육체노동자로 <소월시문학상>(제28회)을 받은 최초의 시인


  <함께 나누기>


  마을 한 바퀴 돌다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저를 안타깝게 만드는 풍경이 하나 나타납니다. 작년까지 멀쩡하던 탱자나무 울이 다 잘려 나갔으니. 어릴 때 탱자나무 울은 흔히 보는 울타리였습니다. 그때는 담 대신 심어 다른 동물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지요.


  나무에 빽빽이 매달린 탱자나무 가시는 보면 두려움을 느끼게 했지만 한편 꽤 쓸모도 있었답니다. 동네 꼬마들 가운데 한두 번 안 찔려본 애가 있었을까요? 찔리면 엄청나게 아팠지만, 고동 까먹을 땐 또 아주 유용했습니다.


  따로 해설 달기 전에 시인 스스로 이 시를 평한 글을 먼저 붙입니다.


  “「주석 없이」는 십 년 전쯤에 쓴, 연애시다. 우리 동네 뒷산 올라가는데 불쑥 써졌다. 산책길에 탱자나무 울타리 돌 때 갑자기 이 시가 나한테 찾아왔다. ‘연애시’라고 했지만 사실은 나의 '시론'을 얘기한 시다.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 버린 나를 이해해다오’ 이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고 시를 읽고 쓰는 방법이다. 나는 무식하다. 나는 지식이 아닌 본능, 직관으로 시를 쓰는 게 참 좋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 읽으면 좀 어려운 시인데, ‘연애시’란 관점에서 보면 접근이 가능합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 때 / 너는 전반부 없이 이해됐다 / 너는 주석 없이 이해됐다”

  화자는 아마도 탱자나무 울타리를 돌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극심한 아픔을 느낀 경험 있을 겁니다. 그 순간, 탱자나무와 가시를 단번에 이해했겠지요. 길을 가다가 (혹은 소개받은 자리에서) 그대를 보는 순간 가시에 찔림과 같은 아찔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 온몸에 글자 같은 가시가 뻗쳤다 / 가시나무 울타리를 나는 맨몸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다가올 아픔보다 현재의 아픔이 더 강하다던가요, 나의 온몸이 전율하듯 그대를 향합니다.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에 촘촘히 박힌 가시를 비집고 그대에게로 향합니다. 아픔을 아픔으로 느끼지 못한 채.


  “가시 속에 살아도 즐거운 / 새처럼 / 경계를 무시하며”

  어떤 새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나뭇가지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잘 드나듭니다. 나는 비록 그러지 못하나 아픔조차 기쁨으로 여기려 합니다. 앞날을 보면 분명 행복보다 아픔이 많은 삶이 보이지만 아픔을 녹이는 사랑의 강력한 힘을 믿습니다.


  “1초 만에 너를 모두 이해해 버리는 나를 이해해다오”

  “나는 너를 이해하는 데 1초가 걸렸다”


  내가 그대를 1초 만에 이해했다고 그 사랑의 진실을 가볍게 여기지는 말아주세요. 진짜 사랑은 오랫동안 머물러 얻는 게 아니랍니다. 무릇 사랑이란, 단 1초만에 그대를 모두 이해해야 합니다. 왜 사랑에 오래 전주는(계산하는) 시간이 필요한가요?


  시인이 이 시를 연애시(戀詩) 대신 시론으로 썼다고 했는데 그러면 다른 해석이 붙습니다. 구차한 설명 없이 읽는 순간 들어오는 시가 정말 시라고. 그래서 시인도 지식이 아닌 본능, 직관(直觀)으로 시를 쓴다고 했을 겁니다.

  독자도 그렇지요. 읽는 순간 확 다가오는 시가 더 좋은 시라 여길 때가 많습니다.


  (아랫마을 탱자나무 울타리 -  지금은 다 베어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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