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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1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36)

제136편 : 이선영 시인의 '마른 꽃'

@. 오늘은 이선영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마른 꽃
                     이선영

  시들고야 말았다
  식었다

  그대에게서 오래 전 받은 따뜻한 꽃 한 송이

  벽에 거꾸로 매달린 채 하세월

  사랑은 말라붙은 꽃만 남기고
  기어이 그대를 벽에 꽂아놓진 못했어도

  내 마음 깊은 어디쯤에
  딱딱하게 걸려 넘어가지 않는 마른 꽃

  속이 다 비고도
  바스러지지 않는
  - [일찍 늙으매 꽃꿈](2003년)

  #. 이선영 시인(1964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화여대에 출강.
  '이선영'이란 이름이 흔해선지 동시 쓰는 이선영도 있고, 소설 쓰는 이선영도 있고, 아나운서 이선영도 있으니 혼동하지 마시길




  <함께 나누기>

  어디선가 읽은 글귀가 생각납니다. “꽃은 두 번 피어난다. 한 번은 진짜 꽃으로, 또 한 번은 드라이플라워로.” 우리 집 주위엔 요즘 들꽃과 심은 꽃이 한창입니다. 뿐인가요, 집 안에도 마른 꽃이 있을 때가 종종입니다.
  아내가 성당 제대를 장식한 꽃을 바꿀 즈음이면 가져와 말립니다. 밖에 꽃이 아무리 피어 있어도 안에 피어 있는 마른 꽃에도 눈길이 갑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시들고야 말았다 / 식었다”

  화자는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따뜻한 꽃 한 송이를 받았습니다. 아시다시피 꽃은 이내 시들지요. 그래서 그 꽃이 시들어갈 즈음 마른 꽃으로 만들었나 봅니다. 마른 꽃이 되면 더 이상 시들지도 않고 그대와의 사랑도 식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꽃이 시들더라도 사랑만은 식지 않기를 바랐건만 꽃이 시들 듯이 사랑도 식고 시들었습니다. 그대를 영원히 잊지 않으려 그대의 화신인 그 꽃을 마른 꽃으로까지 만들었지만...

  “벽에 거꾸로 매달린 채 하세월”

  단순하게 보면 꽃을 바로 세워두지 않고 거꾸로 매다는 드라이플라워 만드는 장면입니다. 한편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랑과 그 사랑을 지켜내려는 꿋꿋한 의지, 둘 다 함축하는 시행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말라붙은 꽃만 남기고 / 기어이 그대를 벽에 꽂아놓진 못했어도”

  마른 꽃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비록 생화보다는 못하지만 그렇게라도 사랑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아니 그대를 마른 꽃을 벽에 걸 듯 내 마음 한구석에 오래오래 걸어두고 싶었습니다. 그게 비록 어려울지라도.

  “내 마음 깊은 어디쯤에 / 딱딱하게 걸려 넘어가지 않는 마른 꽃”

  사랑은 꽃처럼 시들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이라도 사랑이 식어갑니다. 식지 않는 사랑, 시들지 않은 사랑, 과연 있을까요? 그렇지만 싱싱한 꽃이 마른 꽃이 되면 또다른 꽃의 흔적으로 살아남습니다. 그처럼 사랑도 흔적을 남깁니다. 추억이든 아픔이든.

  “속이 다 비고도 / 바스러지지 않는”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속이 다 비고도 바스러지지 않는 마른 꽃처럼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벽에 거꾸로 매달린 채 그대 사랑의 흔적을 지닌 마른 꽃처럼 지금도 어디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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