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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20.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37)

제137편 : 박노해 시인의 '도토리 두 알'

@. 오늘은 박노해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도토리 두 알
                            박노해

  산길에서 주워 든 도토리 두 알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나는 손바닥의 도토리 두 알을 바라본다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년)

  *. ‘헨리 데이빗 소로우(미국 출신의 철학자이면서 문인. 초월주의자와 생태주의자로 사후에 널리 알려짐)’의 글에서 따옴

  #. 박노해 시인(1957년생, 본명 박기평) : 전남 함평 출신으로 일반적 등단 과정을 거치지 않고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을 펴냄으로 등단. 노동운동에 앞장서 구속되었다가 출소 후에는 '생명 평화 나눔'을 기치로 한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해 대안적 삶의 비전 제시.




  <함께 나누기>

  언젠가 외신에 나온 기사입니다. 한 기자가 교수로, 학자로, 문필가로, 강연자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여성과 인터뷰하다 묻습니다.
  “당신이 이룩한 것 가운데 최고 가치 있는 성공은 무엇입니까?”
  “아이의 엄마가 된 것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해하자, 그녀가 덧붙였습니다.
  “다른 건 다 나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지만, 엄마가 되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시로 들어갑니다.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 / 한 알은 크고 윤나는 도토리”

  화자는 산책길에 도토리 두 알을 줍습니다. 한 알은 작고 보잘것없어 갖고 싶지 않는 반면 다른 하나는 크고 윤이 납니다. 이 순간 우리들 대부분 망설임 없이 선택할 겁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크고 윤이 반질반질 나는 토토리를.

  “너희도 필사적으로 경쟁했는가”

  피가 터지도록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인간이 던지는 당연한 질문이나 도토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면 그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경쟁하지 않았다고. 그저 자연의 순리를 따랐을 뿐 남보다 더 크고 윤이 나길 바라지 않았다고.

  “내가 더 크고 더 빛나는 존재라고 / 땅바닥에 떨어질 때까지 싸웠는가 / 진정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 즈음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바가 드러납니다. 자연은 누가 더 빛나는 존재가 되라고 경쟁 붙이지 않았건만 인간 세계는 경쟁, 또 경쟁이지요. 내 아이가 착하게 성장하느냐에 목표 두기보단 어떡하면 남들보다 더 뛰어나느냐에 목표 두며 사니까요.
  배려심을 지니라고, 양심적으로 정의롭게 행동하라고 가르치기보다 어떻게 하면 수학능력시험 점수 많이 딸 수 있을까만 궁리했으니.

  “크고 윤나는 도토리가 되는 것은 / 청설모나 멧돼지에게나 중요한 일 /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한 건 참나무가 되는 것”

  크고 빛나는 도토리가 되는 건 다람쥐나 청설모에겐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되지만 도토리 입장에서는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나무가 도토리 열매를 맺는 일은 청설모 먹이가 되고자 함이 아니라 다음 해 참나무 싹을 틔움에 있으니까요.

  “나는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 멀리 빈 숲으로 힘껏 던져주었다 / 울지 마라, 너는 묻혀서 참나무가 되리니”

  언젠가 「흥덕왕릉 안강목」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습니다. 경주시 안강읍에 가면 흥덕왕릉이 있는데 거기 소나무가 특별하다는 식의 내용으로. 여기서 소나무가 특별하다는 말은 뛰어나다기보다 너무 많이 휘어지고 구부러져 볼품없다는 뜻 담았습니다.

  소나무가 곧게 뻗으면 목재로 잘려 집 지을 때 가구 만들 때 쓰이겠지만 휘어지고 구부러졌기에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소나무는 태어날 때 목재로 쓰이려 자라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준 수(壽)를 누리며 살다가 후손을 만들기에 사명을 다하면 끝입니다.
  도토리도 그렇습니다. 굵고 윤이 나 사람이나 동물의 눈에 띄어 그들의 먹잇감이 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떡하면 후손을 많이 퍼뜨릴까에 그 목적이 있으니까요.

  참, 참나무와 관련된 속담 '참나무는 들판을 보고 열매를 맺는다'를 아시는지요?
  참나무가 높은 산에서 먼 들판을 내려다보고 곡식이 풍작이면 자신의 번식에 필요한 만큼 최소의 도토리만 열리게 하고, 반대로 흉작이면 참나무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양보다 훨씬 많은 도토리 맺어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열매를 먹게 한다고.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참나무도 그런 넉넉함을 지녔는데 우리 인간은 어떤지요. 그나마 작고 보잘것없는 도토리를 외면했기에 그들이 살아남아 다시 어린 참나무를 만들어 자연을 풍요롭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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