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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21. 2024

목우씨의 산골일기(173)

제173화 : 넘들과 농갈라묵는 재미

@. 우리와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할머니가 병원 생활하신 지 일 년 가까이 됩니다. 오늘은 그분의 쾌유를 비는 뜻에서 몇 년 전 이맘때 쓴 글을 올립니다.


     * 넘들과 농갈라묵는 재미 *


  요즘 달내마을엔 토목ㆍ석축 공사가 한창이다. 작년(2018년) 태풍 피해를 본 계곡에 제방 다시 쌓느라 삽차 -'포크레인'을 우리말로 순화한 표현 -와 레미콘이 쉴 새 없이 드나든다.
  거기에 나름 살기 좋은 전원마을로 소문나선지 곳곳에 새로 집 지을 터 다지기에도 바쁘다. 이 마을에 맨 처음 우리가 전원주택 지은 뒤 한 집 두 집 늘어나더니, 이제 누가 사는지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며칠 전 터 다지는 곳에 가봤더니 한쪽에 칡이 드러나 있었다. 굴삭기 작업하다 나온 모양이다. 기사는 그것에 관심 없는지 버려져 나뒹굴고. 칡의 약효를 뒤적이니 ‘안면홍조, 불면증, 불안감, 우울증, 가슴통증, 두근거림, 근육통, 관절통’ 등 다양한 증상을 겪는 갱년기 여성에게 좋다고 한다.
  허나 칡의 약성(藥性)은 겨울에 좋고 이즈음에는 떨어진다 하여 캐러 다니는 이가 없다. 그래도 공짜인데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아내가 봤으면 혀를 찼으리라, 또 쓸데없는 일 한다고. 아니 실컷 애써 말려놓고는 남 줘버릴 짓을 왜 하냐고 잔소리께나 했으리라.

  사실 작년 가을에도 우연히 계곡 들어갔다가 급경사에 반 이상 드러난 칡을 공짜로 얻었다. 갖고와 말려 한 자루 만든 칡을 며칠 전 알고 지내던 이가 와 줘버렸다. 손질하다가 손가락도 다치면서 애써 만들어서는 왜 남 주느냐고?




  "넘들과 농갈라묵는(나눠먹는) 재미가 억수로 좋대예."

  처음 이사 와 우리 집 아래 사시는 할머니 하시는 말을 믿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밭에 나는 작물 갖다줄 때는 뭘 바라는 게 있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은가. 봄에는 산속 다니며 팔다리 긁혀 가며 캐온 산나물을, 여름과 가을에는 밭에서 나는 남새를, 또 겨울에는 도라지를 갖다준다. 이러면 뭔가 목적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할머니네 수확한 쌀도 성당 교우들에게 팔아주고, 퇴직 전엔 오디와 도라지도 학교에 갖고 가 팔았다. 나로선 고마움에 대한 보상보다는 받았으니 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그냥 있기에는 뭔가 조금 미안한.

  그저께는 양파 조금, 도라지 조금, 풋고추 조금 든 비닐봉지가 축담 아래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갖다 놓은 것이리라. 이제는 이 농산물들을 아무 부담 없이 받는다. 그저 주는 게 기쁘다 하시는 할머니 말씀이 진심임을 알기에.


(때론 상추도 갖다놓고...)



  시골 생활 십 년이 넘어가면서 묘한 습관이 생겨났다. 우리 집에 들렀다 가는 사람들에게 빈손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뭐라도 찾아 손에 안겨줘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모처럼 들른 이들에게 집안 구석구석 뒤져 줄 만한 게 뭐 없는가 하고 찾는다.
  마침 적당한 게 눈에 띄면 그대로 줘버린다. 빈손으로 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찾다 찾다 보이지 않을 때는 좀 난감하기까지 하다. (우리 집 들렀는데도 못 갖고 가신 분들은 제가 바빠서 그랬을 거라고 양해해 주시길)

  왜 이럴까, 내가 그렇게 인심 좋은 사람이었나? 아니다. 나는 결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그렇다면 왜 이럴까? 답은 바로 내가 사는 곳에 있다. 조그만 텃밭이라도 가꿔본 사람은 알리라. 열 평 남짓만 있어도 한 식구 먹고사는 데 큰 지장 없으니.
  헌데 우리 집 마당만 해도 얼마인가, 텃밭만 가꿔도 최소 백 평이 넘는다. 거기 나오는 농산물은 우리 둘 먹고도 남는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는 아주 적게 심는데 그래도 남는다. 남는 걸 버릴 수 없으니 줄 수밖에. 돼지감자도 개똥쑥도 어성초도 상근피(桑根皮 : 뽕나무 뿌리껍질)도 보리수도 앵두도 그렇게 하여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갔다.


(때론 양배추도 갖다놓고...)



  보름 전 오디 털 때 이런 내용의 글을 몇몇 밴드에 올린 적 있다.
  “주말이 아닌 평일에는 우리 집에 놀러오셔서 오디 그냥 주워 가세요.”
  그랬는데 딱 한 사람만 와서 갖고 갔다. 설마 공짜로 갖고 가란 말일까 하고 의심해선지, 아니면 주중에는 시간이 나지 않아선지, 그도 아니면 잘 아는 처지 아니라 부담스러워선지. 한 분은 거저 갖고 갈 수 없다며 자기 집에서 거둔 유기농 매실을 오디보다 몇 배나 더 갖고 왔다. 덕분에 그것도 아는 이와 나눌 수 있었고...

  참고로 다듬어 놓은 - 이물질 다 제거한- 오디는 돈을 받고 팔았다. 그 까닭은 노력이 엄청 들었기 때문이다. 오디 털다 떨어지면 죽을 위험까지 각오해야 한다. (그래서 올해는 낮은 곳까지만 올라감)
  줍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허나 온갖 이물질 섞인 상태에 제대로 된 오디만 골라내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 줍는 시간의 열 배 이상 노력이 필요하니 말이다.


(자세히 보면 오디에 불순물이 섞여 있어 반드시 골라내야 함)



  시골에 살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몇 가지는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손윗동서의 댁에 가면 막 퍼준다. 심지어 김장거리인 배추도 무도 마늘도 다 공짜다. 그러나 딱 두 가지 쌀과 고추는 돈을 주고 사온다.
  벼농사가 수월해졌다고 해도 여름 땡볕 속에 논둑을 사흘돌이 다니며 예초기 돌려야 하고, 제때 약 치는 수고가 여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고추는 심고 가꾸는 일이야 다 하는 일이라 해도 거두어 말리는 공이 엄청나게 든다. 장마철에는 자칫하면 곰팡이 피어 태양초는커녕 곰팡초가 되니 신경써야 하고.


  내일 쓸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태백이가 짓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너머 창밖을 보니 또 할머니가 비닐주머니에 뭘 담아 오신다.
  “넘들과 농갈라묵는 재미가 억수로 좋대예.” 하는 말을 이제는 믿는다. 할머니의 가장 큰 재미(?)가 아닌가.


(때론 완두콩도 갖다놓고...)



  그저께 한나절을 칡 다듬는데 다 보냈다. 일단 씻어야 한다. 그리고 통째로 말려지지 않으니 토막을 내야 한다. 그러러면 손도끼 잘 들도록 숫돌에 갈아야 하고. 손도끼로 되지 않으면 칼이 들어가야 한다.
  또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 상처가 났다. 아내가 봤으면 목에 핏대를 올렸으리라. 몸 다쳐가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에 매달린다고. 그럴 시간 있으면 고추와 토마토 지지대를 좀 더 보강해 주지 했을 텐데 다행히 지금 집에 없다.

  ‘근주자적(近朱者赤)’이란 한자가 있다. '붉은 것을 가까이하면 자기도 모르게 붉게 물든다'는 뜻으로, 착한 사람과 사귀면 착해진다는 속뜻을 지닌다. 할머니로 하여 도시에서 살면서 손익에 민감함으로 무장한 한 인간이 '주는 맛'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마이 멀었다. 남 주는 일보다 내 것 챙기기 더 좋아하니까. 수치로 계산할 순 없지만 남 주는 것보단 내 것 챙기기가 훨씬 많다. 뿐이랴 게다가 줄 때도 친한 정도의 경중을 따지고, 어떤 땐 주고 나서 아까운 생각이 들 때도 가끔이다.


(감 해거리 하던 해 아드님 시켜 두 상자나 보냄)



  그러니 문득 ‘황모삼년(黃毛三年)’ 하는 한자성어도 떠오른다. '누런 개꼬리'를 아궁이 속에 넣어둔다고 해서 '검은 족제비꼬리'로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는 근본적으로 안 될 인간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변하지 않는다는 속뜻을 담고 있다.

  ‘나는 근주자적이 될 것인가, 황모삼년이 될 것인가?’
  ‘넘들과 농갈라묵는 사람이 될 것인가, 내 것만 챙기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해답은 분명 나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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