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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24.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38)

제138편 : 박규리 시인의 '그 변소간의 비밀'


@. 오늘은 박규리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그 변소간의 비밀
                                  박규리

  십 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 번도 똥을 푼 적 없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 거라는 둥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둥 말도 많았습니다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 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 하여간 그곳은 이상하게 냄새도 안 나고 볼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는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훤한 걸 보면요 분명 뭐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도요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요 한 줌 사랑이든 향기 잃은 증오든 한 가지만 오래도록 품고 가슴 썩은 것들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속에 맺힌 서러움 제 몸으로 걸러서, 세상에 거름 되는 법 알게 되는 것이어서요 십 년 넘게 남몰래 풀과 나무와 어우러진 늙은 변소의 장엄한 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도 하지만요  밤마다 변소가 참말로 오줌 누고 똥 누다가 방귀까지 뀐다고 어린 스님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구미호 같은 보살 말고는, 그 누가 또 짐작이나 하겠어요
  - [이 환장할 봄날에](2004년)

  *. 변소간 : 측간, 정낭, 똥간, 해우소

  #. 박규리 시인(1960년생) : 서울 출신으로 1995년 [민족예술]을 통해 등단.  이 시인에게 '공양주 시인'이란 별명이 붙었는데, 젊은 시절 잠시 마음 다스리려 전북 고창군에 있는 ‘미소사’란 절에 들렀다가, 그 절에 일할 사람 없다는 말에 도와주다 보니 공양주(음식 만드는 사람) 보살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함께 나누기>

  제가 교사 초년생일 때 이곳저곳 여행 다니다 한 바닷가 근처 작은 절에 이르러 주지 스님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용변이 급해 해우소를 찾아 볼일 보는데 소리가 나지 않아 근심을 푼 뒤 여쭈었습니다. 오줌과 똥이 어디로 나가는가 하고.
  그때 스님이 껄껄 웃으시며 '어디긴 어디야 바다로 풍덩 빠지지.'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바다로 바로 빠지게 돼 있다니. 그 뒤에 스님은 한 술 더 떠 말을 이었습니다. 해우소 바로 아래에서 고기가 잘 잡힌다고 해 고기잡이배가 끊이질 않는다나요.

  시로 들어갑니다.

  어느 절 해우소는 십 년 넘게 한 번도 똥을 푼 적 없는데 그 까닭은 고이지 않고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해우소는 냄새도 안 나고 볼일 볼 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자라는 나무나 남새들보다 변소간 근처 매실나무가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훤합니다.  그러니 구멍 뚫렸으리라는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밖에. 주지 스님조차 분명 뭐가 새긴 새는 거라고 남몰래 고개 갸우뚱거립니다.

  그런 뒤 이 시에서 가장 눈여겨볼 시행이 나옵니다.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깊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도요"

  박규리 시인의 강점이 잘 드러난 시행입니다. 시인은 아주 쉽게 얘기를 풀어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냥 지나치지 않게 만듭니다. 변소가 자기를 버릴 구멍을 찾았다? 그렇지요, 뭐든 오래 고이면 냄새나고 썩기 마련입니다. 그 절 변소는 스스로를 정화할 비법을 찾았습니다.

  "막막한 어둠 속에서 더 갈 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요"

  위 시행에 이어 시의 깊이를 더하는 부분입니다. 삶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절망만 오는 게 아니라 희망도 함께 옴을. 이런 말을 흔히 듣습니다. 드디어 바닥이라고 느끼는 순간, 이제 더 내려갈 일은 없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모든 변소의 역할은 자기 몸에 똥오줌을 채우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러운 것을 몸으로 받는 일입니다. 허나 늙은 변소는 단지 채움에서 끝나지 않고 사랑과 증오와 서러움을 다 거르고 삭혀서 세상에 거름 되는 길을 알려줍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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