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Jun 26.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40)

@. 오늘은 신현림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랬지
                                   신현림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지
  옷에서 떨어진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서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안다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 [해질녘에 아픈 사람](2004년)

  #. 신현림 시인(1961년생) : 경기도 의왕 출신으로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첫 대학엔 미술(디자인)을, 옮긴 대학에선 국문학을, 대학원에선 사진 전공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시와 산문, 사진, 여행에 관한 글을 씀




  <함께 나누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 전 뛰어난 연기로 인정받은 여배우가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소개합니다. 한때 잘 나가다가 결혼 후 은막을 떠난 뒤 아이 낳고 육아에 전념하다 다시 연기가 하고 싶어 예전에 알던 영화계 관계자를 찾아갔나 봅니다.
  배역을 맡겨 달라고 하자, 비중이 아주 얕은 역을 맡겼습니다. 순간 그녀는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 하며 그 자리를 뛰쳐나왔고. 그 뒤 한두 곳에서 더 오디션을 보았는데 거기에서도 별 눈에 띄지 않는 역을 맡겨 역시 거절했고...

  거절이 늘어나면서 그녀를 찾는 곳 없을 때 자기처럼 결혼 후 은막을 떠났다 재기에 성공한 선배를 찾아가 얘기를 꺼냅니다. 다들 자기를 너무 무시한다고. 얘기를 듣고 난 뒤 그 선배가 한 말입니다.
  “네가 젊어 한때는 인기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때랑 달라. 스스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널 써줄 감독은 없을 걸.”
  그 순간 머릿속이 훤해지면서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그런 뒤 주어진 변변찮은 단역을 하나하나 소화하면서 다시 예전의 대배우로 돌아가게 되었답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먼저 '가질 수 없는 것 다 상처랬죠' 누구에겐가 묻는 것 같은 제목의 답을 짐작해 봅니다. ‘가질 수 없는 건 다 상처다’와 ‘가질 수 없다 하여 다 상처인 건 아니다’로.
  가질 수 없는 게 다 상처가 된다면 어떨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되지 않을까요? 다음 '가질 수 없다 하여 다 상처인 건 아니다'로 풀이하면 우리가 힘들어 다 포기하고 만 사안들이 상처인 것만은 아니니까 어떤 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 시에서 1~3연은 그냥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4연부터 시인의 힘이 느껴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안다"

  우리는 대체로 하찮게 보고, 보잘것없다고 무시해 버렸던 일들이 지닌 큰 힘을 모르고 지냅니다.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가느다란 거미줄의 힘을,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 등등.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범하게 넘기지 않고 슬픔, 외로움, 절망, 아픔의 근원을 파고들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구하는 순간 내가 흔들리게 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힘들어도 아파도 외로워도 이까짓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순간 어떤 벽도 돌파할 힘이 생깁니다. 주먹을 쥐고 허공을 휘저어도 공기 한 줌 잡을 수 없듯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내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어도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외칠 때 우린 비로소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13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