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다친 비둘기가 앉았다 간다 술 취한 노숙자도 낮잠 자다 간다 신문지 몇 장 남겨두고 간다 이따금 모과나무 가지 사이 며칠 잠 못 잔 하늘이 왔다가 간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듯 그렇게 살 수는 없나, 중얼거리며 상심(傷心)한 얼굴로 커피 한 잔 마시고 간다 어린아이도, 마른 꽃잎도, 성가 소리도 앉았다 간다 낙엽 질 땐 속눈썹 긴 바람이 잠깐 앉았다 가고 그 뒤에 키만 훌쩍 큰 저녁이 멈칫멈칫 따라와 대책 없이 줄담배 피우고 간다
누구나 와서 쉬었다 가는 돌의자 날마다 세상을 향해 조금씩 길어지는 돌의자 -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2002)
#. 전동균 시인(1962년생) : 경북 경주 출신으로 1986년 [소설문학]을 통해 등단했으며, 현재 동의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함께 나누기>
전에는 산에 오르거나 조금 먼 길을 갈 때 중간에 쉬지 않고 갔습니다만 지금은 이십여 분 걸으면 꼭 쉴 곳부터 찾습니다. 요즘은 길가에 나무 의자 잘 비치돼 있어 거기 앉으면 되는데 나무 의자에 앉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벌레가 놀거나 썩었을 때가 종종이니까요. 그럴 때 평평한 돌이나 돌의자가 있으면 웬 떡이냐는 심정으로 앉습니다. 흙먼지만 후 불면 거기보다 나은 곳 없으니까요. 특히 더운 여름날이면 찹찹함까지 느껴져 참 좋습니다. 아, 다만 거기에 누우면 안 되겠죠. 자칫하면 입이 돌아갑니다.
전동균 시인이 의자를 글감으로 만든 시가 꽤 됩니다. 한 시인이 한 글감으로 여러 편 쓴다는 건 드문 일이지요. 제 눈에 띈 것만 해도 「나무 의자」 「의자」 「돌의자」 「삐걱대는 의자야, 너도」 「아무 데로나 흘러가는 의자」...
시로 들어갑니다.
시인이 무슨 볼일 있어 광화문 쪽에 들렀나 봅니다. 그때 성공회 앞뜰에 자리한 모과나무가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엔 모과나무에 달린 모과만 보려 했는데 그 아래 자리한 돌의자로 눈길이 옮겨갑니다. 쉴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겠지요. 거기에 자기처럼 지나가는 사람만 쉬는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발목 다친 비둘기, 술 취한 노숙자도 낮잠 자다 갑니다. 심지어 모과나무 가지 사이를 오가던 하늘도 피로했는지 잠시 쉬러 왔다 힘 얻은 뒤 다시 가는 곳입니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듯 / 그렇게 살 수는 없나, 중얼거리며”
모과나무에 모과가 열리고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현상은 자연의 순리에 따른 순탄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허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 다음에 이어지는 시행을 보면 ‘역시 문예창작과(지금은 국문과) 교수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표현이 얼마나 참신한지요. “상심한 얼굴로 커피 한 잔 마시고 간다” “어린아이도, 마른 꽃잎도, 성가 소리도 앉았다 간다” “낙엽 질 땐 속눈썹 긴 바람이 / 잠깐 앉았다 가고”
참신함의 절정은 다음 시행입니다. “그 뒤에 키만 훌쩍 큰 저녁이 멈칫멈칫 따라와 / 대책 없이 줄담배 피우고 간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나올까요. 읽는 순간 책갈피에 넣어두었습니다. 이 표현을 제 맘대로 두드려보겠습니다. ‘키만 훌쩍 큰 저녁이 멈칫멈칫 따라와’는 해거름이 느릿느릿 몰려오는 저녁의 정경을 표현한 듯하고, ‘대책 없이 줄담배 피우고 간다’는 마치 저녁 무렵 시골 아궁이에 불 지피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누구나 와서 쉬었다 가는 돌의자 / 날마다 세상을 향해 / 조금씩 길어지는 돌의자”
돌의자엔 부자도 빈자도 차별 없고, 사람도 동물도 앉을 수 있고, 심지어 자연도 지나가다 잠시 쉬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넉넉함 때문에 돌의자는 조금씩 길어져 더 많은 중생들이 앉아 쉬도록 하려는 걸까요. 저절로 길어질 수 없는 돌의자가 마치 생명체처럼 길어진다는 표현, 우리네 마음도 이렇게 길어지고 넓어졌으면 참 좋겠습니다.